세기말 '또 다른' 시네필 다이어리
20세기말에 중학생이었던 나는 공포영화를 좋아했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10대들은 무서운 이야기나 놀이공원 귀신의 집을 좋아한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 시절 베스트셀러 '공포특급'의 에피소드들 중 몇 개는 지금도 기억에 남을 정도다.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김청기 감독의 로봇물이 좋았고 성룡, 홍금보, 원표의 영화가 좋았던 나는 1995년을 계기로 영화에 대한 지식이 조금 넓어졌다. 그 해는 영화탄생 100주년이 된 해였고 서점에는 '세계영화 100선'이라는 책들이 쏟아졌다. 당시 영화평론가들이 저마다의 시각으로 고른 100편의 걸작들 가운데 내 눈에 띈 것은 조지 로메로의 1968년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었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좀비영화'인 그 작품이 보고 싶어서 비디오가게 여러 곳을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애초에 출시가 됐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지역 신문에 작은 광고가 실렸다. 부산 남천동의 어느 영화단체에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상영한다고 한다. 내가 살던 곳은 같은 부산이었지만, 남천동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꾸역꾸역 시간을 만들어 남천동 KBS부산 뒷편으로 향했다. 허름한 건물의 작은 공간, 사무실로 사용됐을 것 같은 장소에는 당시로서는 꽤 큰 브라운관 TV가 있었다. 그리고 10명이 채 되지 않는 관객들이 그 자리에 모였다. 영화를 소개하는 단체 사람은 해당 비디오를 해외 쇼핑몰에서 직구했다고 했다. 그런데 구매하고 바로 준비하느라 자막 작업을 못했다고 했다. 중학생 영어 정도 겨우 공부한 (심지어 성적도 그리 좋지 않았던) 나는 그렇게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자막없이 봐야 했다. 내가 그날 찾아갔던 곳은 부산을 대표한 비영리 영화단체 '씨네마떼끄 1/24'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는 '영화감독 봉준호'의 탄생설화와 같은 이야기를 다룬다. 대학생 봉준호를 비롯해 몇 명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영화단체를 결성했고 각 분과를 나눠서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를 연구했다. 굳이 시네필을 세대별로 나눠보면 나는 노란문 다음 세대였을지도 모르겠다. 1998년 고등학교 3학년 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입시를 준비하면서 씨네마떼끄 1/24에서 결성한 스터디모임에 참석했고 그 다음해 재수를 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는 그곳에서 '무보수'로 일을 했다. 스스로 '조기축구회'라고 평가했던 '노란문'에는 그래도 30여명의 소속원들이 있었다. 부산의 메이저 씨네마떼끄였던 1/24에는 단체장과 3명의 직원, 그리고 몇 명의 골수회원만이 있었다. 부산은 그만큼 문화적으로 낙후된 곳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 시네필 사이에서는 나름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다. 서울에서 나름 메이저리그('노란문' 기준)인 문화학교 서울에서는 '십만원 영화제'를 열었다. 캠코더 보급이 대중화되면서 10대들도 작은 돈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문화학교 서울의 '십만원 영화제'에서는 영파여중 방송반이 만든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가 파란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 당시 영화잡지 키노에 소개되기도 했다. 시네마떼끄 1/24는 이를 벤치마킹해 '언더그라운드 캠코더 영화제'라는 걸 만들었다. 부산, 경남의 10대들에게도 영화를 만들어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루킹 포 파라다이스'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시네마뗴끄 1/24에 일하면서 나름 캠코더 영화 출품을 해보기도 했다. 확실히 그때의 나는 영화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다만 이 영화제는 '십만원 영화제'처럼 영화업계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부산도 나름 문화적 혜택의 중심에 이른 사건이 있었다. 1996년에 시작한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였다. 씨네마떼끄 1/24에게 부산국제영화제는 전통시장의 추석 명절과 같았다. 할 일도 많았고 바쁘다는 의미였다. 내가 시네마떼끄 1/24에서 일했던 1999년에도 당연히 바빴다. 그 해에 1/24는 처음으로 비공식 데일리를 제작했다. 씨네21과 프리미어 등이 주도하고 있던 그 틈새시장을 파고 든 것이다. 당시 피프광장은 지역 영화단체와 대학, 영화전문학교 등이 어우러진 장터와 같았다. 그 장터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1/24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 데일리는 1년을 넘기지 못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 지역 영화단체와 시네필들에게 단비와 같은 행사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시네마떼끄 1/24는 서서히 말라죽기 시작한 계기가 됐다. 1999년 8월에 부산시는 수영만 요트경기장 내에 시네마테크 부산을 열었다. 이 시설은 공공기관이 인정한 첫 시네마테크(당시 1/24는 '시네마떼끄'로 표기했고 이곳은 '시네마테크'로 표기했다)였다. 서울에 시네마테크 KOFA가 문을 연 게 2008년이었으니 그보다 약 10년 가까이 빨랐다. 시네마테크 부산은 당시 영화제 상영작을 데이터베이스화 해서 운영했다. 그 당시까지 해외 비디오테이프를 직구해 복사한 다음 자막을 입히거나 EBS 일요시네마를 녹화했던 1/24는 게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2000년에 나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1/24를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24는 해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지금도 매년 부산과 부천, 전주로 여행을 떠난다. 여전히 영화를 보고 영화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겁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영화를 향한 짝사랑은 거기까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면 조금 울적해진다. '노란문'의 마지막 자막은 영화와 함께 청춘을 불태웠던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현재에 충실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나는 나의 현재가 조금은 즐거워지길 바란다. 영화가 온전히 나의 현재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 현재의 작은 부분으로라도 남아주길 바란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세계영화사 공부할 때처럼 영화를 뜯어보는 짓은 이제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