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닭국밥의 사사로운 영화리스트 10편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 이 다큐멘터리는 별 다른 기교가 없다. 그저 엔니오 모리꼬네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시간 순서대로 쭉 훑어간다. 여기에는 엔니오 모리꼬네를 잘 알고 그와 함께 작업한 사람들의 인터뷰와 참여한 작품, 그리고 '엔니오의 음악'이 함께 하고 있다. 영화를 연출한 쥬세페 토르나토레는 엔니오 모리꼬네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는 '시네마천국'부터 거의 모든 작품의 음악을 엔니오 모리꼬네에게 맡겼다. 엔니오를 잘 아는 만큼 그는 이 다큐멘터리에 별 다른 기교가 필요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저 엔니오의 음악이 이 영화를 완성하게 될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쥬세페의 그 선택은 적중했다. 별 다른 기교가 없어도 숨도 안 쉬고 한 사람의 인생을 정주행 할 수 있었다. 위대한 음악들이 BGM처럼 흘러나오는 인생 정주행은 별 다른 기교가 없어도 큰 감동을 준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최고의 원재료를 가져가 최소한의 가공을 해서 원재료의 맛을 살린 요리다.
'괴물'
-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에는 루머도 쉽게 생산된다. '괴물'은 루머가 범람하는 시대를 비정하게 관찰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정보의 창구들이 주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루머는 극소수일 뿐, 실제 루머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마치 루머는 정보가 범람하지 않던 시대에도 기생하고 있었던 것처럼 스멀스멀 사람들 사이에 퍼진다. 이것은 정보화 시대의 양면성이다. 이 시대에는 루머가 쉽게 퍼지기도 하지만, 루머의 검증도 쉬워진다. 다만 누구도 루머를 검증하려고 하지 않는다. 루머는 유통기한이 짧아서 조금만 지나면 '진실'로 숙성된다. '괴물'에는 루머가 진실로 변질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 비정한 정보의 유통 아래서 아이들의 비밀은 잠들어있다. 흙더미에 뒤덮힌 비밀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게 비밀은 막혀있던 기찻길을 지나 훨훨 날아간다. 이승이 아닌 곳에서라도...
'거미집'
-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 시리즈인 '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할리우드 추억의 영화들의 제작 뒷이야기를 전한다. 유쾌하고 빠른 편집으로 스탭과 배우들의 이야기를 듣는 이 시리즈가 전하는 뒷이야기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어떤 영화든 우당탕탕 만든다는 점이다. 관객이 흔히 생각하는 영화만들기는 작가의 고뇌와 함께 여러 스탭들의 일사분란한 협업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화들은 예산이 부족하고 일정이 촉박하다. 감독과 제작자는 입장이 다르고 그것을 조율하면서 영화를 찍는 게 핵심이다. '거미집'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당탕탕 영화만들기'다. 이 유쾌한 소동극에는 영화를 만드는 작가의 고뇌와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기이하고 낯선 70년대의 스타일로 전하는 감독의 자기고백은 마치 그와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진솔하게 다가온다. 영화를 만드는 게 이렇게 어렵다. 그리고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일은 이토록 감동적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유쾌하다.
'메뉴의 즐거움: 트와그로 가족'
-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로 처음 만난 프레데릭 와이즈먼은 93세의 고령임에도 지독하게 고집스럽고 인내심이 강하다. 자신이 관찰하는 현장에서 원하는 메시지가 나올 때까지 끈질기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다른 다큐멘터리였다면 이쯤에서 작가가 개입해 장면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지만, 프레데릭 와이즈먼은 자신의 목소리를 감추고 끝까지 현장에서 메시지를 얻는다. 4시간이 넘는 다큐멘터리가 대부분이지만, 그의 지독한 뚝심은 볼 때마다 놀랍고 감동적이다. 프랑스 외곽의 미슐랭 레스토랑이 요리를 준비하는 과정을 진득하게 담은 이 다큐멘터리는 낯선 세계로 떠나 그곳에 머무르는 경험을 선사한다. 다른 의미로 이 영화는 '체험'에 가장 완벽하게 접근하는 방법이다. 다큐멘터리가 관객에게 '체험'을 선사하는 방법은 진득하게 앉아서 끈질기게 장면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이런 자리가 아니었다면 내가 언제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에 머물면서 그곳의 요리를 맛볼 수 있었을까?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 지난해 '탑건: 매버릭'부터 올해 초 '더 퍼스트 슬램덩크'까지, 유난히 추억을 소환하는 작품을 자주 만난다.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는 추억 소환의 정점과 같은 영화다. 영화 속 세대들과 동년배는 아니고, 그들보다 1.5세대 정도 뒷 세대지만 부산의 열악하고 특수한 환경에서 영화에 미쳐 영화를 꿈꿨다. 이 간결한 다큐멘터리를 아쉽게도 극장에서 보지는 못했다. 작은 노트북 모니터로 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뜩 몰입해서 봤다. 온전히 영화를 사랑했던 10대 시절로 떠나게 해준 이 영화에 감사하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그렇게 신나게 봐서 그런지 영화의 에필로그는 더 아련하다. 노란문 멤버들의 현재가 마치 나의 미래처럼 느껴진다. 편안하다는 느낌도 들지만, 한편으로 영화를 떠나보내면서 청춘이 가버린 건 아닌지 서글프기도 하다. 아직도 영화를 꿈꾸고 싶지만, 이제는 꿈꾸는 게 허락되지 않는 나이가 된 것 같다. 생은 꽤 치열하다.
'다음 소희'
- 영화의 모티브가 된 LG유플러스 상담원과 관련된 사건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두고 LG유플러스 관계자와 대화한 적이 있다. 당연히 그들은 원청이었고 상담센터는 하청인 만큼 도의적 책임은 느끼지만, 법적 책임은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계기로 해지방어팀에 대한 개선이 이뤄져 지금은 그런 일이 생길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애초에 영화가 기획되고 공개된 순간부터 이 사건은 '지나간 사건'이다. 영화를 알게 됐을 떄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은 "왜 지나간 사건에 집중했는가"였다(감독은 늦더라도 해야 하는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화를 곱씹어보니 '다음 소희'는 사건 하나에 대해 고발하지 않는다. LG유플러스 상담원 사건과 유사한 사건들로 범위를 확장하지도 않는다. 영화의 시선은 그보다 더 넓은 곳을 바라본다.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있는 경쟁중심주의, 거기에 지치고 상처받고 좌절하는 청춘들. 대기업들은 연말 임원인사를 발표하며 '성과주의'를 강조한다. 성과를 낸 임직원에게 보상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온전히 성과와 실적만이 중심이 되는 경쟁사회라면 좌절하고 쓰러지는 다수는 누가 일으켜 세워줄 것인가. 경쟁에서 패배한 자는 죄인이 아니다. '다음 소희'는 경쟁 그 자체를 꼬집으면서 경쟁에서 벗어나버린 모두를 위로한다. 이는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다.
'슬픔의 삼각형'
- 자본주의의 그림자에 대한 고민은 늘 품고 산다. 그렇다고 내가 사회주의자인 건 아니다. 자본주의는 보편적 사회를 구성하는 질서이며 세계 경제의 근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인에게 이르면 자본주의는 분명 맹점이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반대말을 찾아서 가는 대신 현재의 자본주의를 보완하고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슬픔의 삼각형'은 인간성이 실종된 자본주의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준다. 예쁘고 잘생긴 주인공 남녀를 보면 정이 갈만도 하지만, 이들도 딱히 정감을 살 행동을 하진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 영화에는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다 인간군상에 가깝다. 누구나 기회를 가진다는 점이 자본주의의 이상향이지만, 자본을 중심으로 권력관계가 형성되면 누군가는 기회를 얻지 못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매커니즘과 그것의 폐해를 보여준다. 이토록 서슬퍼렇고 지저분한 냉소는 염세주의적인 나에게는 자기 위로와 같다. 이 모양인 세상에서 희망을 바라기는 어려울테니, 에라이 구토나 갈기자.
'플라워 킬링 문'
- 자본주의의 정점에 있는 나라는 당연히 미국이다. 미국이 현재의 이념과 질서를 얻게 된 데는 몇 가지 크고 작은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플라워 킬링 문'은 그 크고 작은 사건들 중 하나를 쫓는다. 이 영화는 데이비드 그랜의 동명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1920년대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아메리칸 원주민인 오세이지족을 상대로 한 연쇄살인사건이 그 배경이다. 이 사건은 현재 FBI 탄생의 바탕이 됐다. 이 영화가 다루는 미국 자본주의의 근간은 어네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 니로)의 모습으로 보여진다. 이 사건은 몰리의 노력과 FBI의 전신인 BOI의 개입으로 해결된다. 이 이야기에서 FBI는 정의의 편이다. 그러나 1924년 존 에드가 후버가 FBI 국장이 된 후 FBI는 미국 어두운 권력의 상징이 됐다. BOI의 맹활약이 미국 어두운 권력의 상징을 낳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플라워 킬링 문'은 그 자체로도 부정한 미국 백인들의 역사를 보여주지만, 영화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 역시 부정한 미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미국 범죄 느와르 영화의 가치를 한껏 끌어올린 인물이다. '플라워 킬링 문'에 등장한 몇 번의 살인장면은 그의 전작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더 덤덤하고 잔인하다. 이 영화는 미국인의 자기반성이자 마틴 스코세이지의 참회록과 같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 내 청춘의 낭만은 마블코믹스보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에 가깝다. 그래서 올해 본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더 낭만이 느껴진다. 처음에는 이 작품에 대해 별 기대가 없었지만, 경기가 이어질수록 가슴이 뛰고 주먹을 불끈쥐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보면서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봐야 했다. '슬램덩크'는 원래 그런 이야기였다. 각본없는 스포츠의 매순간에 이야기를 담아 더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게 '슬램덩크'의 매력이다. 거기에 만화책으로 보면서 상상했던 장면들이 그 감정 그대로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되니 10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흥분과 희열이 느껴졌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청춘으로 향한 시간여행이다.
'파벨만스'
- 나는 '레디 플레이어 원'이 나왔을 때 '스필버그의 은퇴작이 이 영화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할리우드가 꿈의 공장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을 마련한 스필버그가 현재 영화시장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하기에 더 없이 완벽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벨만스'를 보고 나는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아버지가 아니다. 단순히 그 단어로 스필버그를 평가한다면 그에 대한 평가절하로 봐야 할 지경이다. 스필버그는 그의 친구들(조지 루카스, 마틴 스코세이지, 브라이언 드 팔마,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과 함께 미국 영화의 바탕을 만든 인물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세계 영화사에 대단히 큰 족적을 남겼다. '파벨만스'는 그 족적의 처음을 담은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스필버그의 첫 영화인 '듀얼'이 다시 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가장 성공한 영화감독의 영화인생을 되짚어가는 일은 영화과 1학년 1학기 첫 전공수업 때 배우는 '세계영화사'와 나란히 둬야 한다. '파벨만스'는 스필버그가 그 정도로 가치있고 위대한 인물이라는 점을 증명한다. 스필버그는 대단한 감독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 이상으로 대단한 감독이다.
[아깝게 탈락]
'콘크리트 유토피아'
'밀수'
'서울의 봄'
'영웅의 조건'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라인골드'
'더 웨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