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시사

청년들에게 '놀 권리'를 보장하라

불닭국밥 2022. 10. 31. 13:15

주말에 신촌에서 가볍게 놀았다. 집에 들어와 자려고 누웠는데 안전 안내 문자가 계속 왔다. '이태원 해밀턴호텔 인근 긴급사고로 현재 교통 통제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불과 하루 전 충북 괴산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살벌하게 울어대던 재난문자에 비하면 차분하게 도착한 문자였다. 그저 교통사고라도 났나보다 생각했다. 그러다 몇 통의 문자가 더 도착한 걸 보고, 뭔가 심상치 않아서 포털사이트 뉴스를 살폈다. 압사사고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심정지 환자가 속출했다는 헤드라인이 뉴스를 도배했다. "어떻게 하면 길 한복판에서 압사사고가 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태원에서 노는 편이 아니라서 그 지역 지리를 잘 몰랐다. 가더라도 해밀턴호텔 길 건너에 주로 있었다. 이태원이 골목이 많은 곳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할로윈을 맞아 10만명의 인파가 몰릴 거라는 뉴스도 본 기억이 난다. 같은 날 다녀온 신촌도 평소보다 사람이 많은 편이긴 했다. 그래도 한국에서 압사사고라니,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니... 믿기 어려운 뉴스였다. 

참담한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까지 후속보도가 계속 나왔다. 154명 사망자들의 신원이 대부분 확인됐다. 이태원답게 20, 30대가 많았고 여성의 비중이 높았다. 구두 때문에 넘어지기 쉽고 물리력이 약해서 사망자 비중이 더 컸던 모양이다. 몇 개의 뉴스는 이번 사고에 대해 '세월호 이후 최대 참사'라고 말하고 있다. '세월호', 언급하는 것조차 고통스런 이름을 다시 꺼내어본다. 기분 좋게 수학여행을 떠나려던 아이들이 배가 침몰하면서 목숨을 잃었다. 2014년에 고등학교 2학년, 1997년생이다. 만약 그 아이들이 살아있었다면, 할로윈 파티를 즐기며 놀 수 있는 나이가 됐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태원 현장에 있었던 20, 30대들은 2014년에 또래의 아이들이 탄 배가 침몰되는 뉴스를 실시간으로 본 세대들이다. 10대 시절 참사의 트라우마를 보며 자란 세대들은, 20대가 돼서 그것이 반복되는 현장을 보고 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해 '일부'(극히 일부) 어른(혹은 포털뉴스 댓글러)들은 지나친 수준의 댓글을 달고 있다. 차마 옮길 수 없어서 요약하자면 이번 사고는 그저 '놀다가 생긴 일'이라는 반응이다. 놀러가서, 자기들끼리 어울리다가 생긴 일이라는 반응이 있다. 돌이켜보면 세월호도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제주도 관광을 떠났다가 생긴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놀러 갔다가 생긴 사고'에 대해 '사고 당한 사람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마치 '노는 일'이 죄스러운 것처럼. 우리나라 어른들은 유독 애들이 노는 모습을 못 본다. 젊을 때는 공부도 해야 하고 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어른들이 만든 시스템은 더 공부하고, 더 일 시킬 수 있도록 이뤄져있다. 아이들은 걷기 시작하면서 여러 개의 학원을 다닌다. 아직 한글도 제대로 못하는 데 영어까지 배운다. 공교육이 뼈대를 세우고 남은 빈틈은 사교육이 빽빽하게 채운다. 고용주들은 조금이라도 싼 값에 청년들을 일 시킬 궁리를 한다. 제도는 청년들이 더 일할 수 있도록 고용주에게 틈을 주고 있다. 간단한 질문을 던져보자. 젊을 때 좀 더 놀면 안되는 것인가?

대한민국은 위태로운 나라였다. 150여년 전에 주권을 빼앗겼고, 70여년 전에 전쟁을 치렀고 폐허 위에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 사이에 경제주권이 빼앗겨 고통받던 시기도 있었지만, 끝내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나 선진국의 위치에 이르렀다. 여러 위기를 겪으며 오늘날의 위치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일본과 중국의 견제를 받으며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경쟁에서 뒤쳐졌을 때 다른 나라에 잡아먹혔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이 나라는 더 강해지도록 국민들을 채찍질 하고 있다. 그 채찍질의 대상은 청년들이다. 어른들이 청년들에게 바라는 것은 더 강하고 유능한 청년이 돼서 우리나라가 외세로부터 침략받지 않는 선진국이 되는 것이다. 침략의 트라우마는 100년 넘게 대를 이어 계승돼왔으며 지금의 청년들에게도 그것을 대물림하고 있다. 경쟁하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고 지금까지도 부모는 자식에게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경쟁해야 할까?

보수적인 어른들이 이태원에서 코스프레하고 술 마시며 춤추는 청년들을 곱게 보진 않을 것이다. 어른들의 눈에 그들은 그저 나태하고 게으른 청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뉴스로 전해지는 사망자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어봐도 그들은 자기 삶에 충실하고 주변에 친절한 청년들이었다. 할로윈이 만든 놀이문화는 그들에게는 '놀기 좋은 주말'이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놀기 좋은 주말에 그들은 참변을 당한 것이다. 이번 이태원 참사 중에는 논란이 되는 장면도 있었다. CPR을 하는 구급대원 옆에서 노래를 틀어놓고 춤추는 청년들, '압사 ㄴㄴ'라고 전광판에 새겨놓은 클럽의 모습 등이다. 여기에 대해 '공감능력 부족'이라는 말은 대단히 공감한다. 공감능력은 다른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는 일이다. 앞서 나는 경쟁을 강요하는 어른들의 정서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일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해야 가능하다. 오늘날 교육은 타인에게 공감했다가는 뒤쳐질 수밖에 없도록 이뤄져있다. 거리에서 일하는 청소부를 본 어른이 옆에 있던 어린 자녀에게 "너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저 아저씨처럼 길에서 일한다"라고 하는 에피소드는 꽤 현실이 반영된 이야기다. 요즘 아이들의 공감능력 부족을 탓하기 전에, 그들(일부)이 왜 그렇게 됐는지 헤아려야 할 것이다. 

경쟁을 강요하는 것은 책임지는 일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다. 누군가가 강요된 경쟁에서 뒤쳐진다면 그는 남탓을 할 수 있다. 그 경쟁은 시켜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뛰어든 경쟁에서 뒤쳐진다면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다. 아이돌이 되고 싶어서 연습생으로 들어간 10대가 경쟁에서 뒤쳐진 것에 대해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는 것과 같다. 아이돌이 되는 건 본인의 선택이고 그 책임은 본인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경쟁에 뛰어들도록 하는 것은 놀 권리를 보장하는 데서 이뤄진다. 경제성장을 이룩한 나라에서는 청년들의 놀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노는 것을 죄악시 여기는 사회구조와 시선들이 바뀌어야 한다. 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안전하게 놀 권리'에서도 비롯된다. 축제에 참여했다가 참사를 당한 것은 그들 스스로의 잘못이 아닌, '안전하게 놀 권리'를 보장하지 않은 시스템의 잘못이다. 그 거리에 나간 청년들은 누구도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바쁜 일상 중 잠깐의 여유로 놀다가 끔찍한 일을 당했다. 트라우마가 만든 경쟁의 시스템에서 자란 청년들은 타인에게 공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모든 잘못은 부조리를 계승하고 안전한 시스템을 만들지 못한 기성세대에게 있다. 나는 그저 '세월호'와 '이태원'을 관통한 90년대 중후반 세대들에게 '놀이'가 트라우마로 자리잡게 될 지 염려스러울 뿐이다. 이 말은 특정 정권을 겨냥한 말이 아니다. 

선거를 치르면 후보자들이 내세우는 단골 공약 중 '일자리 창출'이 있다. 거의 모든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주요 과제로 내세우며 표를 얻고 있다. 국가 간의 경쟁이 거세지는 사회에서는 일자리를 창출해 산업역군을 기르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 옆에, 아주 작게라도 놀 권리를 보장하는 공약이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 BTS도 놀이문화를 보장하려는 데서 비롯됐다(영화, 드라마, 음악). 우리나라의 산업자산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벤처열풍을 타고 등장해 '경쟁'에서 승리하며 성장한 어느 IT기업은 초대형 사고를 치며 공분을 샀다). 잘 놀 줄 아는 사람, 창의적으로 놀 줄 아는 사람도 우리 경제의 중요한 자산이다. 당장 '할로윈'을 외국의 명절이라며 비난한 사람들도 있다. 미국에서는 할로윈을 키워드로 파생된 문화 콘텐츠만 수천개가 넘는다. 우리의 문화는 청년들에게 정당한 놀 권리를 보장했는가. 놀이가 경쟁이 돼선 안된다. 놀다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콘텐츠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놀 수 있어야 한다. 청년들에게 놀 권리를 보장하라. 그것이 기성세대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다. 

 

 

안타까운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