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에 다녀왔습니다만 - Day 3
이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속으로 생각한 게 있었다. 라멘, 스시 위주로 식사를 하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기왕이면 일본의 정체성을 외면하더라도 현지인들의 일상이 녹아든 음식을 먹고 싶었다. 그래서 여행 첫날에도 피자와 맥주를 먹었고 이후 삿포로에 넘어가서도 관광객 맛집은 가급적 피할 생각이었다. 예전부터 명동이나 을지로를 돌아다니면 캐리어 가방을 끌고 다니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그들을 겨냥한 식당으로 들어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비빔밥이나 불고기, 삼겹살 등을 파는 집이었다. 나는 그들을 볼 때면 "더 맛있는 집이 많은데"라며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내가 그들의 위치에 서고 나니 비빔밥, 불고기와 같은 위치에 있을 것 같은 라멘, 스시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이후 여행에서 적어도 한 번은 라멘, 스프커리를 먹었지만, 그것이 여행을 지배하게 두지는 않았다.
럭키삐에로는 햄버거를 파는 집이다. 대표메뉴는 상하이치킨버거라고 한다. 전날 가벼운 마음으로 이 집을 가려고 했다가 하코다테 거의 전 매장에 웨이팅이 걸린 걸 보고 궁금증이 커졌다. 그래서 우리는 하코다테를 떠나기 전 오픈런으로 먹어보자고 결심했다. 처음에는 "아침부터 누가 햄버거를 먹겠냐"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 앞 럭키삐에로에 도착하자 엄청난 웨이팅 줄을 목격했다. 전날 같은 장소의 웨이팅에 비하면 3배 이상 긴 줄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전날 럭키삐에로를 둘러볼 때 점심을 먹었어야 했다. 그 엄청난 웨이팅 줄을 보고 든 생각은 "여까지 왔는데 우야긋노? 무야제(여기까지 왔는데 어쩌겠니? 먹어야지)"였다. 그래서 이번 여행 첫 웨이팅을 서기로 했다.
긴 싸움이었다. 약 1시간30분의 웨이팅을 서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중도포기를 했다. 중도포기는 초반에 뒷줄에서 많이 일어난다.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 포기를 못하는 사람들이 버티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에게 시간은 넉넉했다. 그래서 버텨보기로 했다. 햄버거 하나 먹기 위해 길 한 복판에 서서 사람을 구경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다리와 허리가 아파 죽을 것 같다는 것만 뺀다면. 여담이지만, 일본에서 첫 웨이팅을 하고 나니 한국의 캐치테이블 같은 기업들이 일본에 진출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대도시에 가면 웨이팅이 이것보다 더 심하다고 들었다. 캐치테이블에게는 블루오션이라고 확신한다.
긴 기다림 끝에 먹은 햄버거의 맛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럭키삐에로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상하이치킨버거에 계란후라이+치즈 옵션을 추가해서 먹었다. 자극적이지 않은 소스와 치킨이 짭짤함이 조화를 이뤘다. 그러나 1시간반 줄서서 먹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 정도 웨이팅이라면 뭘 먹어도 기다린 값은 보상받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럭키삐에로에서 나는 하코다테의 정체성과 감성을 먹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문제는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 이대로는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마침 럭키삐에로에는 음식 외에 굿즈를 팔고 있었다. 모자와 의류, 에코백 등으로 시작해 라멘, 음료, 당고 등을 팔았다. 기다린 게 억울해서 뭐라도 사가자는 생각으로 당고와 음료 몇 개를 사갔다. '당고'라는 이름은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들어봤다. 말로만 들었지 맛이 어떨지 궁금해서 호기심에 당고를 구입했다.
첫 일본여행이었으니 뭐든 호기심이 생겼으리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고는 정말 맛이 없었다. 뜨거운 곳에 오래 놔둬서 흐물해진 찹쌀떡이 먹을 수 있는 비닐에 둘러쌓인 느낌이었다. 일본에서도 MZ세대들은 안 먹겠다 싶은 맛이었다. 모나카, 쌀과자를 즐기던 우리 어르신들이 그래도 '맛잘알'이라고 생각했다. 당고와 함께 구입한 음료 중에는 '과라나'라는 게 있었다. 브라질의 열대과일이라고 하는데 홋카이도에서만 음료로 판다고 한다. 카페인 농도가 커피의 2배 정도 되며 이를 추출해 에너지 드링크의 카페인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과라나 음료의 맛은 탄산이 강한 박카스를 닮았다. 썩 나쁘지 않은 맛이었지만, 과라나 과일 생긴 걸 보니 입맛이 떨어지긴 한다. 과일치고 상당히 기괴하게 생겼다.
햄버거를 먹고 열차시간까지 하코다테역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제서야 하코다테에서 유명하다는 '아침시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사실 홋카이도에 사는 지인은 아침시장에서 오징어회덮밥을 먹어볼 것을 권했다. 오징어회는 좋아하는데 그걸 덮밥으로 먹는다는 게 신기해서 일단 검색을 해봤다. 그냥 오징어회는 부산앞바다에서 회로만 즐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코다테역 바로 옆에는 작은 상가가 있었다. 그곳에도 '요코초'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확히는 과거의 요코초를 실내에 재현한 곳에 가깝다. 딱히 재미있는 건 없었다. 상가 바로 옆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힘든 여정에 몸을 실었다.
하코다테에서 삿포로로 가기 위해서는 약 4시간 가량 기차를 타야 한다. 과거 KTX가 없던 시절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 약 4시간 정도 걸린다. KTX에 익숙해진 지금은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2시간30분 안에 기차로 갈 수 있다. KTX가 닿지 않는 곳은 4시간 이상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여행을 자주 하지 않던 나는 근 20여년만에 4시간 동안 기차여행을 하게 됐다. 삿포로로 가는 길은 노보리베쯔에서 하코다테로 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간다. 앞서 자세히 적지는 않았지만, 이 기찻길은 꽤 매력적이다. 마치 한국의 동해선처럼 바다를 끼고 달리는데 간간히 마을과 주택이 보이지만, 인적이 드문 숲길도 보인다. 처음부터 다른 나라의 생활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시작한 여행인 만큼 흥미로운 지점이 정말 많았다. 예를 들어 한국이라면 철길 옆에 주택을 짓지 않을텐데 일본은 철길 바로 옆에 주택이 많다. 그 역시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의 형태가 아닌 가정집이 눈에 띈다. 1개 세대가 거주하는 가정집인 만큼 집을 지은 방식도 제각각이다. 그런 집을 구경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이번 여행에서 시간관계상 제외시킨 장소 중 '도야호(湖)'가 있었다. 구글지도로 이곳을 보자마자 "'소년탐정 김전일' 에피소드 하나 뚝딱 나오겠다"라고 생각했다. 도야호는 큰 호수 한 가운데 나카지마 섬이라고 하는 작은 섬이 있다. 여기에는 나카지마 미즈미노모리 자연사 박물관이 있다. 별 다른 다리가 눈에 띄지 않는 걸로 봐서는 배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김전일, 미유키를 포함한 몇 명의 일행이 박물관을 찾았다가 이 곳에 고립되고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가 탄 열차는 도야호로 갈 수 있는 도야역을 지난다. 기분탓인지는 몰라도 도야역을 지나는 길은 조금 으스스했던 것 같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사람이 북적거리는 건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럭키삐에로의 긴 줄이나 다이몬 요코초의 인파가 전부였지만, 그건 한국에 비하면 북적거린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분명 '골든위크'라고 들었는데 뭐가 골든위크인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삿포로에 다다를 즈음, 어느 역 앞에서 처음으로 북적거리는 인파를 봤다. 조금 과장하자면 퇴근시간 사당역에 버금갈 정도로 북적거렸다. 우리는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을 둘러봤다. 우리가 지난 곳은 기타히로시마역이었다. 열차는 이곳에 정차하지 않았다. 역을 지나서 조금 시간이 흐르자, 우리는 엄청난 인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에스콘 필드 홋카이도가 있었다. 니폰햄 파이터스의 홈구장이었다. 마침 야구에 아주 흥미가 없지도 않은 우리는 "여기서 야구나 볼까?"라고 했다. 그러나 NPB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던 관계로 야구장은 우리 관광코스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길고 긴 4시간 기차여행 끝에 삿포로역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을 시작하고 3일만에 대도시에 입성한 것이다. 삿포로는 도쿄나 오사카에 비하면 큰 도시는 아니라고 한다. 일본 모리빌딩의 싱크탱크인 모리기념재단이 지난해 7월 발표한 일본 도시 순위에서 삿포로는 10위를 차지했다. 이 통계는 도쿄 23구를 제외한 일본 136개 도시 중 경제·생활·교통 등 6개 분야, 총 86개 지표에 점수를 매겨 산출했다. 삿포로는 오사카, 요코하마, 나고야, 후쿠오카, 교토, 고베, 센다이, 마쓰모토, 가나자와보다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삿포로역에서 맞이한 도시의 첫 인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도시"라는 것이었다. 물론 중심가를 벗어난다면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지만, 일단 대도시는 대도시였다.
삿포로에서 숙소는 홋카이도청이 보이는 장소로 정했다. 홋카이도청 건물이 꽤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그걸 볼 수 있는 곳으로 숙소를 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홋카이도청은 내년까지 공사 중이었고 우리가 잡은 방은 '도청뷰'가 아니었다. 아쉬움에 아쉬움이 더해졌지만,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홋카이도청이 있는 작은 숲은 삿포로에서 지내는 내내 마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지내다 우리는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저녁은 '홋카이도 지인'에게 추천을 받은 곳으로 정했다. 이 지인이 말하길 "관광객은 절대 가지 않을 집"이라고 한다. 야키니쿠 전문점이고 삿포로역에서 멀지 않은 스스키노에 있었다. 우리는 시내 구경을 할 겸 스스키노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삿포로역에서 스스키노로 가는 길은 놀라울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구간은 지하도가 잘 조성된 곳이라고 한다. 홋카이도는 워낙 눈이 많이 오는 만큼 지상으로 다니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지하도를 곳곳에 뚫어뒀다고 한다. 스스키노로 가는 사람들은 전부 지하로 다니는 건지 궁금해졌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도심길을 지나자 꽤 번화한 곳이 보였다. 여기서 우리를 반긴 건 '스스키노 니카 사인'이라는 거대한 간판이었다. 오사카에 그 유명한 '글리코 사인'만큼은 아니지만, 삿포로의 정체성을 담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가 성수기인 겨울에 이 곳에 왔다면 주변에서 한국어가 쉬지 않고 들려왔을 것 같았다. 4월말의 삿포로 거리에서도 한국어는 심심치 않게 들렸다. 나고야, 오사카, 도쿄 등을 다녀온 여친은 "이 정도면 한국어 진짜 안 들리는 편"이라고 한다.
'홋카이도 지인'이 추천한 야키니쿠집은 정말 찾기 어려운 곳이었다. 건물 사이 으슥한 골목길에 엄청나게 허름한 가게들 사이에 있었다. 정말 찾기 어려운 곳이며, 찾아도 별로 안 가고 싶은 곳이었다. 뭣 모르는 관광객은 그 골목길에 들어갔다가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추천을 받은 덕에 그 으슥한 골목길로 과감하게 들어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가게가 문을 닫았다. 우리가 간 날은 '쇼와의 날' 하루 전날이었다. 공식적으로 '골든위크'의 시작에 접어든 날이다. 그래서 이 사장님도 연휴에 쉬시나 싶었다. 사실 이 집은 구글맵에 구체적인 휴무 일정이 나오지도 않는다. 시간 정보도 없고 평점도 없다. 결국 우리는 29일에 이 집에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만약 그날도 가게 닫혔다면 운명이 아닌 셈이다.
모든 계획이 틀어지자 우리는 스스키노 시내를 정처없이 헤맸다. 거리 구경은 꽤 재미있었다. 3일만에 본 일본 대도시는 여러모로 신기했다. 그 중 가장 신기한 거 하나만 꼽자면 일반적인 업소들 사이로 성인업소가 심심치 않게 끼어있다는 점이다. 정말 뭣 모르는 관광객은 성인업소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거리 구경은 재미있었지만, 이제는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쯤 웨이팅이 끝내주는 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전혀 계획에 없었지만, 삿포로 라멘 요코초를 찾은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언젠가 라멘은 한 번 먹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인 것이다. 라멘 요코초의 좁은 골목길로 진입했다. 입구 쪽에 있는 매장은 럭키삐에로가 생각날 정도로 엄청난 웨이팅을 보였다. 이미 아침에 1시간반 웨이팅을 한 입장에서 더 줄을 설 수는 없었다. 다행이 요코초 안 쪽에는 웨이팅이 그리 길지 않았다. 안 쪽의 라멘집 중 매운 라멘을 파는 어느 가게로 들어갔다. 일단 배가 무진장 고팠다. 좁은 가게에서 매운 돈코츠 라멘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한국의 매운맛보다야 심심했지만, 고기 육수와 간이 짭짤해서 해장용으로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라멘을 먹고 그 유명한 돈키호테에 갔다. 여친이 말하길 일본 관광의 필수코스라고 한다. 딱히 물욕도 없고 선물할 사람도 없던 나는 "그래서 뭘 사야하지?"라고 생각했다. 일단 내가 먹을 거 위주로 쇼핑을 했다. 그런데 여친은 쇼핑 내내 "메가 돈키호테 치고는 작네"라고 말했다. 쇼핑을 마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메가 돈키호테는 우리가 들른 곳 바로 옆에 있다. 우리가 들른 곳은 그냥 돈키호테다. "저곳도 들를까?"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양손 무겁게 쇼핑을 마친터라 그냥 숙소로 복귀했다.
숙소에 복귀하고 우리는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다. 다음날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관광객 답게 돌아다니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여행의 클라이막스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