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의견

보호 받지 못한 목숨들

불닭국밥 2023. 7. 21. 04:05

올해 초 영화 '다음 소희'를 보고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을 검색해봤다. 해당 사건은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현장실습의 명목으로 저임금의 노동을 강요한 가운데 일어난 일이다(통신사 콜센터는 대표적인 감정노동 직업이다. 그 가운데서도 해지방어팀은 그야말로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다). '다음 소희'는 특성화고 현장실습 중 일어난 여러 사고 중 하나다. 스무살을 채 맞이하지도 못한 청춘들이 저임금 노동을 강요받다가 부실한 안전관리와 과다업무로 목숨을 잃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다음 소희'는 10대 고등학생들을 부실한 노동현장으로 내모는 특성화고의 시스템을 들춰낸다. '다음 소희'와 함께 수면 위로 등장한 여러 사고들을 접하면서 "참 많은 학생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모든 학생들은 학교의 보호를 받아야 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산업 현장에 내던져졌다. 안전관리는 부실했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은 그것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못했고 결국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2023년 7월 21일, 언론에서는 두 청년들의 죽음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20대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일, 그리고 폭우 이후 실종자 수색을 나갔던 해병대원이 급류에 휩쓸려 사망한 일이다. 두 젊은이는 아마도 서너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났을 것이다. 20대 초반의 성실한 청년들은 앞으로 사회에서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은 더 이상 이룰 수 없게 됐다. 이 비극은 청년들이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초등학교 교사는 학교에 온 학생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학교는 '교직원'인 교사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교사는 학교에 고용된 직원이고 학교는 자신의 직원을 보호해야 한다. 당장 드라마 '신사의 품격'만 봐도 직원이 부당한 일을 겪으면 사장이 나가서 싸운다. 사장은 책임을 지는 자리다. 학교에서는 직원의 부당한 일에 대해 교장, 교감이 나서서 싸우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라고 월급 더 많이 받는 거다. 기자사회에서도 수습기자는 '사고치는 사람'이라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수습기자는 사고를 치면서 배우고 선배기자(데스크)는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렇게 수습기자는 다시는 사고치지 않게 학습을 하고 이 다음에 자기 후배의 사고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선배기자가 된다. 

공무원 사회에서는 유난히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직급이 낮은 사람이 사고를 쳐도 상급자는 '문책하는 사람'이 되지 '책임지는 사람'이 되진 않는다. 공무원 사회의 옆에서 일해본 경험으로는 감시자가 너무 많아서 책임을 기피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공무원은 자신의 상급자와 의회, 민원인, 언론의 눈치를 봐야 한다. 학교라면 학생과 상급자, 의회, 교육감, 학부모 정도 될 것이다. 직급에 상관없이 눈치를 봐야 한다는 이유로 책임지는 일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교사가 학부모의 민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적어도 교장, 교감은 여기에 방패막이가 됐어야 했다. 새내기 교사의 죽음은 자기 살 길 찾기 바쁜 선배들 사이에서 방패없이 홀로 내던져진 어린 청년의 죽음이었다. 그저 학부모라는 이유로 부당한 갑질을 할 수 있도록 열어주는 것이 아닌, 학교가 나서서 대신 욕을 먹더라도 자기 직원을 보호할 수 있는 '회사'가 됐어야 했다. 그것이 학부모의 갑질을 막는 기나긴 싸움의 첫 걸음이었으리라. 새내기 교사는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해 억울하게 죽었다. 

또 다른 청년도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해 죽었다. 해병대원의 죽음 앞에 현직 소방관인 아버지는 "왜 구명조끼를 주지 않았냐"라며 해병대 관계자에게 항의했다. 군대는 예전에 비해 한결 인권을 중요시하고 있다. 휴대전화 사용이 가능해지고 군 내의 구타와 가혹행위가 사라졌고 부실한 시설 개선도 이뤄지고 있다. 다만 오랫동안 군 조직에 몸 담은 직업군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군인=소모품'이라는 인식이 있다. 실제로 전시에 군인은 '군수물자'로 분류된다. 군 병원(군단지원)에서는 1년에 평균 3건 정도의 시신을 받는다. 대부분 사인이 명확해서 부검을 따로 하지는 않지만, 소위 '시체를 닦는' 일은 해야 한다. 이때 투입되는 인원이 군수담당관과 군수병, 의무병 3명이다. 군 인권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 커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전히 군에서는 군인을 군수물자로 보는 모양이다. 

이 말은 해병대원에게 구명조끼를 주지 않은 일이 의도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무리하게 작업에 투입되면서 병사나 지휘관이나 안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는 의미다. 일선 지휘관의 과실이 분명하고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최근 뉴스에서 보도됐던 초임장교의 박봉과 열악한 처우는 군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군인은 전쟁에 투입되는 요원이다. '대민지원'은 군인에게는 일과와 같은 일이지만, 수해를 복구하는 삽질이나 힘 쓰는 일 정도만 해야 했다. 하천변 실종자 수색같은 위험한 일은 훈련받은 구조인력을 투입했어야 했다. 그런 사리분별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군대에서는 작전계획과 전투세부규칙을 마련하고 전쟁에 대한 매뉴얼을 꼼꼼하게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대민지원에는 매뉴얼이 없다. 그것은 그들의 본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업이 아닌 일에 그렇게 깊게 관여하도록 지휘해서는 안됐다. 

사회 속에서 사람은 누구나 시스템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국민은 국가 시스템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직장인은 회사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 학생은 학교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군인은 상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자식은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피하게 형성되는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는 주인과 노비의 관계가 아니다. 잘못을 했을 때는 당연히 문책을 해야 하고 벌을 받아야 하지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보호를 받아야 한다. 우리의 시스템은 매뉴얼에 명시됐건, 그렇지 않았건 이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단지 시스템 안에 속한 사람들이 그 역할을 충실히 하지 않고 있다. 책임자가 자신의 기관에 속한 사람들을 보호했다면, 학부모가 온전히 학교에 학생을 맡길 수 있었다면, 학교가 끝까지 학생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면, 지휘관이 병사를 끝까지 지킬 수 있었다면,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의무를 지켰더라면, 술을 먹으면 운전대를 잡지 말아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지켰더라면, 적어도 억울한 죽음은 지금보다 더 적었을 것이다. 너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저 시스템 안에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