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6

(스포주의) '아노라' & '우리들의 교복시절' - 왜 지금 신데렐라를 부정하는가

※ 이 글은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상한 '아노라'와 '우리들의 교복시절'에 대한 리뷰입니다. 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서양의 전래동화인 '신데렐라'는 계모와 새언니들의 핍박을 견딘 주인공이 하룻밤 마법으로 왕자와 만나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동화'다. 그 시절 어린이들에게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였을지 몰라도 요즘은 '유치한 이야기' 정도로 취급받는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신데렐라'는 뒤에 '콤플렉스'라는 말이 붙어서 신분상승을 꿈꾸는 심리를 대변하는 말이 됐다. '신데렐라'라는 단어에 더 이상 동화적 낭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1981년 콜레트 다울링의 저서에서 유래됐다. 벌써 40년도 더 된 말이지..

콘텐츠/리뷰 2024.11.05

상처 입은 아이들을 위로하는 세 가지 시선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지도 12년이 지났다. 이 정도 지난 일이라면 슬슬 역사책으로 돌아가야 할테지만, 일본은 아직 그러지 못한 분위기다. 지진의 후폭풍과 같았던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여전히 세계의 골칫거리다. 일본은 앞으로도 수십년동안 이 원전사고를 수습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동일본 대지진이 가져간 훈장과 같다. 일본이, 그리고 세계가 동일본 대지진을 현재진행형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동일본 대지진에 관한 인상은 강하게 남아있다. 산술적으로 따져본다면, 지진이 일어났던 2011년에 10대 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2023년 현재 20대가 됐다. 아마도 그들에게 일본사회는 저성장과 초고령화, 지진의..

콘텐츠/리뷰 2023.10.23

'괴물' & '진리에게' - 루머의 루머의 루머

※ 이 글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소문만 많이 들었다. 재밌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긴 호흡의 드라마를 잘 못 보는 편이라 아직 시도조차 못하는 편이다. 드라마 관람 유무를 떠나서 나는 이 제목이 참 마음에 든다. 심지어 영어 원제인 '13 REASONS WHY'와도 다르지만, 여러가지로 써먹을 지점이 많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 글에도 써먹었으니 이 한글제목을 지은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천재적이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라는 제목은 픽션 바깥에서도 쉽게 써먹을 수 있다. 어쩌면 '논픽션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이 제목이 픽션으로 들어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논픽션의 세..

콘텐츠/리뷰 2023.10.16

[스포주의] '야자수와 전선' - 사악한 행위에 대한 이해

션 베이커의 '레드 로켓'은 꽤 충격적인 영화다. 적어도 '플로리다 프로젝트'라는 풋풋하고 애절한 영화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한물간 포르노 배우와 10대 소녀의 관계를 다룬 이 영화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수준의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나마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영화 '탠저린'을 본 관객이라면 이 감독이 마냥 감성 충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션 베이커의 영화는 감성보다는 밑바닥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려는 의지가 강하다. 로스앤젤리스('탠저린')와 플로리다('플로리다 프로젝트'), 텍사스('레드 로켓') 등 미국의 유명한 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누구도 찾아가보지 않을 것 같은 뒷골목을 배경으로 그곳의 삶을 보여주는 게 션 베이커 영화의 특징이다. 다행스럽게도 '레드 로켓'의 파렴..

콘텐츠/리뷰 2022.10.24

LIFE, 의지대로 사는 삶의 축복

※ 이 글은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람한 '플랜75', '인체해부도', '눈썹',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연대기' 외에 '아워바디'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중심으로 작성했습니다. 언급한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됐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다른 사람과 유기적 관계에서 비롯된다. 사랑하다 다투고, 미워하고 원망하다 후회하고 화합한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유기적으로 변하는 관계 속에서 개인의 온전한 삶은 완성된다. 레니 에이브러햄슨의 '프랭크'나 정윤석의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눈썹'을 보면서 '관계'라는 게 때로는 고통이 될 수 있고, 그 고통의 근원인 언어로부터 해방을 꿈꾼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쓰고 만든 사람 역시 관계가 있었기에 영화라는 공동..

콘텐츠/기획 2022.10.19

[스포주의] '너와 나' - 희뿌연 꿈을 붙잡는 나직한 인사

※ 경고: 이 글에는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영화가 2014년 4월 16일을 기억하는 방법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그날의 진실을 파헤치고, 누군가는 남겨진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아이들의 마지막 순간을 담았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 누군가는 희뿌연 꿈을 꾼다. 조현철 감독의 장편 데뷔작 '너와 나'는 희뿌연 운동장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 영화가, 소위 말하는 '뽀샤시 효과'를 집어넣어 촬영했다는 것은 스틸컷을 보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은 그 뽀샤시의 한계를 넘어서 '현상 중 사고'라고 생각될 정도로 빛이 과하게 들어와있었다. 나중에 카메라가 줌아웃되면서 운동장은 유리창 밖 풍경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영화의 무대가 되는 교실, 새미..

콘텐츠/리뷰 2022.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