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리뷰 21

(스포주의) '아노라' & '우리들의 교복시절' - 왜 지금 신데렐라를 부정하는가

※ 이 글은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상한 '아노라'와 '우리들의 교복시절'에 대한 리뷰입니다. 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서양의 전래동화인 '신데렐라'는 계모와 새언니들의 핍박을 견딘 주인공이 하룻밤 마법으로 왕자와 만나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동화'다. 그 시절 어린이들에게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였을지 몰라도 요즘은 '유치한 이야기' 정도로 취급받는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신데렐라'는 뒤에 '콤플렉스'라는 말이 붙어서 신분상승을 꿈꾸는 심리를 대변하는 말이 됐다. '신데렐라'라는 단어에 더 이상 동화적 낭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1981년 콜레트 다울링의 저서에서 유래됐다. 벌써 40년도 더 된 말이지..

콘텐츠/리뷰 2024.11.05

(스포일러) '조커: 폴리 아 되' - 잘 만든 실패작

'조커'는 1편에서도 개인적인 불만이 있었다. 이는 '다크나이트'의 조커와 비교하는데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불만이다. '다크나이트'에서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빌런'이었다.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히스 레저의 조커는 목적이 없는 악당이다. 요구하는 것도 없고 배경도 알 수 없다. 실제로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자신의 입가에 흉터가 왜 생겼는지에 대해 매번 다르게 설명한다.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고 왜 그러는지 이유도 모르는 빌런은 꽤 공포스러웠다. 게다가 조커는 코믹스에서도 등장하지만, 배트맨의 이면(異面)과 같은 캐릭터다. 조커는 배트맨이 있어야 완전해지며 둘은 서로가 없다면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토드 필립스의 영화 '조커'는 이들 모두를 부정해버린다. 호아킨 피닉스가..

콘텐츠/리뷰 2024.10.04

(스포일러)'대결! 애니메이션' - 그래도 내일은 온다

영화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이 정해진 시간 동안 주인공은 '기-승-전-결'을 경험한다. 여기서 '결'에 이르면 영화의 시간, 이야기 주인공의 시간은 끝이 난다. 그런데 어떤 영화는 이야기가 끝이 나더라도 주인공의 삶이 어디선가 계속 될 거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나는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영화 '보이후드'는 이런 실험의 끝에 선 영화다. 같은 인물들의 성장을 담기 위해 12년동안 촬영한 이 영화는 영화적 시간과 삶이 가까워지도록 하는 일종의 실험이었다. 이 실험을 겪고 나면 영화가 끝나도 인물들이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런 기대는 삶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든다. '보이후드'에 비하면 '대결! 애니메이션'은 시작과 끝이 상당히 명확한 영화다. 이 ..

콘텐츠/리뷰 2024.03.18

[스포주의] '패스트 라이브즈' - 공간이 분리되기까지

기억은 매개체를 통해 명료해지고 생명력을 얻는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를 했던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장소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날 먹었던 음식이나 거리에서 흘러나왔던 음악, 입었던 옷, 액세서리 등 사소한 몇 개의 매개체가 기억을 더 명료하게 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하나의 매개체는 온전히 한 사람을 대체할 수 있다. 광화문에서 자주 데이트를 했다면 광화문이라는 장소는 사랑하는 연인으로 이어진다. 연인이 국물닭발을 좋아했다면 국물닭발이 곧 그 사람으로 기억된다. 기억력이 대단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기억이 명료해지기 위해서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공간'은 기억의 매개체로써 아주 탁월하다. 공간은 인위적으로 만든 매개체가 아니라 기억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매개체다. 텅빈 카페..

콘텐츠/리뷰 2024.03.04

(스포일러)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 - 신에게 버려진 재난에서 살아남기

불의의 사고로 외딴 곳에 조난당한 인물의 이야기는 꽤 전통이 깊다. 조난당한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는 진한 감동을 준다. 불의의 사고를 이겨내고 삶을 지켜내는 사람들의 드라마는 관객들에게 닥쳐온 각자의 현실 고난을 이겨낼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장르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영화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사고를 이겨낸 사람의 이야기가 존재해온 이유도 이 때문이다. 최근에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세상이 좁아지면서 관객들은 더 멀고 외딴 곳에서 조난당한 사람의 생존이야기를 요구한다. 오죽하면 급기야 지구 넘어 달이나 화성에 조난당한 사람을 구해내는 이야기까지 나오겠는가? 우주 한복판에 조난당한 사람이 스스로 살아남아 지구로 귀환한다던지, 화성에서 감자를 키우며 버텨서 살아남아 지구로 돌아..

콘텐츠/리뷰 2024.02.06

[스포주의] '립세의 사계' - 스스로 구원하기

나는 시각적으로 만족을 주는 영화를 좋아한다. 이는 단순히 화려한 CG를 쓰거나 액션연출이 정교한 영화만을 말하지 않는다(물론 그런 영화들도 좋아한다). 빛과 어둠으로 빚은 그림같은 화면과 정성스런 미장센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이명세나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영화가 대표적이다. 그런 내 취향에 웰치맨 부부의 영화는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유화로 그린 애니메이션'이라는 다소 정신나간 발상으로 시작해 미쳐버린 장인정신으로 프레임 하나하나 그려낸 '러빙 빈센트'는 이전에는 본 적 없었던 황홀한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이 부부가 또 한 번 미쳐버린 장인정신을 보여주며 신작을 내놨다. 이번 작품에 대한 관객 반응은 전작 '러빙 빈센트'와 달리 엇갈리는 모양이다. 관객들이 벌써 유화 애니메이션에 적응한 건가 싶..

콘텐츠/리뷰 2024.01.15

'서울의 봄' - 두 개의 리더십(스포주의)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를 좋아한다. 이것은 사내 둘이 대결하는 이야기지만, 관객은 한쪽 편을 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복싱경기의 특징이 그렇다. 두 사람이 피 터지도록 싸우지만, 거기에는 선악구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규칙에 의해 싸우고 승패를 정할 뿐이다. 단순한 듯한 이야기에 진정성을 불어넣으니 영화는 어느 장면, 어느 캐릭터 하나 버릴 게 없는 수준이 돼버린다. 위와 같은 이유로 '주먹이 운다'는 '남자들의 끝장 대결'을 다룬 영화 중 독특한 포지션이다. 대부분 남자들의 끝장대결을 다룬 영화에는 선악구도가 존재한다. 관객은 당연히 선한 자(혹은 조금 덜 악한 자)의 편에 서서 정의가 구현되는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여기에 강한 것들 끼리 맞붙는 데서 오는 타격감도 즐겁다. 가장 ..

콘텐츠/리뷰 2023.11.17

그들 각자의 묘비명 - "나는 이렇게 살았다"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인간의 생애주기로 봤을 때 나는 아직 죽음을 걱정할 나이는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나보다는 죽음에 조금 더 가까워진 나이기는 하다. 주변 사람들이 결혼하던 시기를 지나 돌잔치를 하던 시기를 거치고 나면, 주변 사람들의 가족들이 세상을 떠나는 시기가 온다. 그 시기가 나면 친구와 형제가 세상을 떠나는 시기가 오게 된다. 아마 그때쯤,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약 그때가 온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할까? 죽음을 가까이 두지 않아서 그 생각에 감히 근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을 가까이 둔 노인의 생각을 읽어보면, 죽음이 삶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는 참 좋은 것 같다...

콘텐츠/리뷰 2023.11.06

상처 입은 아이들을 위로하는 세 가지 시선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지도 12년이 지났다. 이 정도 지난 일이라면 슬슬 역사책으로 돌아가야 할테지만, 일본은 아직 그러지 못한 분위기다. 지진의 후폭풍과 같았던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여전히 세계의 골칫거리다. 일본은 앞으로도 수십년동안 이 원전사고를 수습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동일본 대지진이 가져간 훈장과 같다. 일본이, 그리고 세계가 동일본 대지진을 현재진행형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동일본 대지진에 관한 인상은 강하게 남아있다. 산술적으로 따져본다면, 지진이 일어났던 2011년에 10대 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2023년 현재 20대가 됐다. 아마도 그들에게 일본사회는 저성장과 초고령화, 지진의..

콘텐츠/리뷰 2023.10.23

'괴물' & '진리에게' - 루머의 루머의 루머

※ 이 글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소문만 많이 들었다. 재밌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긴 호흡의 드라마를 잘 못 보는 편이라 아직 시도조차 못하는 편이다. 드라마 관람 유무를 떠나서 나는 이 제목이 참 마음에 든다. 심지어 영어 원제인 '13 REASONS WHY'와도 다르지만, 여러가지로 써먹을 지점이 많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 글에도 써먹었으니 이 한글제목을 지은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천재적이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라는 제목은 픽션 바깥에서도 쉽게 써먹을 수 있다. 어쩌면 '논픽션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이 제목이 픽션으로 들어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논픽션의 세..

콘텐츠/리뷰 2023.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