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8

도쿄에 다녀왔습니다만... Day 1

4월말에 일본여행을 다녀온 나에게 "왜 7개월만에 또 떠났는가?"라고 묻는다면 몇 가지 그럴싸한 이유로 답을 할 것이다. ①4월말에 갔던 홋카이도가 꽤 재밌었고 ②지난 몇 년간 여자친구와 제대로 여행을 다니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이 아직 덜 해소됐으며 ③일본이라는 나라에 궁금한 게 조금 더 생겼다. 이 이유들은 어쩌면 핑계일 수 있다. 나는 대외적으로, 그리고 여친에게 '7개월만에 또 일본으로 가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엔화가 남아서". 실제로 나는 홋카이도에 갔을 때 10만엔의 엔화를 바꿨고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4만8000엔 정도 남아있었다. 그 때 이후 엔화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고, 특히 비상계엄 선포 직후에는 미친 듯이 올라버려서 "바꿀까?"라는 미련도 있었지만, 기왕 예약 다 한 거..

일상 2024.12.18

(스포주의) '아노라' & '우리들의 교복시절' - 왜 지금 신데렐라를 부정하는가

※ 이 글은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상한 '아노라'와 '우리들의 교복시절'에 대한 리뷰입니다. 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서양의 전래동화인 '신데렐라'는 계모와 새언니들의 핍박을 견딘 주인공이 하룻밤 마법으로 왕자와 만나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동화'다. 그 시절 어린이들에게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였을지 몰라도 요즘은 '유치한 이야기' 정도로 취급받는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신데렐라'는 뒤에 '콤플렉스'라는 말이 붙어서 신분상승을 꿈꾸는 심리를 대변하는 말이 됐다. '신데렐라'라는 단어에 더 이상 동화적 낭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1981년 콜레트 다울링의 저서에서 유래됐다. 벌써 40년도 더 된 말이지..

콘텐츠/리뷰 2024.11.05

(스포일러) '조커: 폴리 아 되' - 잘 만든 실패작

'조커'는 1편에서도 개인적인 불만이 있었다. 이는 '다크나이트'의 조커와 비교하는데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불만이다. '다크나이트'에서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빌런'이었다.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히스 레저의 조커는 목적이 없는 악당이다. 요구하는 것도 없고 배경도 알 수 없다. 실제로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자신의 입가에 흉터가 왜 생겼는지에 대해 매번 다르게 설명한다.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고 왜 그러는지 이유도 모르는 빌런은 꽤 공포스러웠다. 게다가 조커는 코믹스에서도 등장하지만, 배트맨의 이면(異面)과 같은 캐릭터다. 조커는 배트맨이 있어야 완전해지며 둘은 서로가 없다면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토드 필립스의 영화 '조커'는 이들 모두를 부정해버린다. 호아킨 피닉스가..

콘텐츠/리뷰 2024.10.04

홋카이도에 다녀왔습니다만 - Day 5 (마지막)

모든 여행이 마찬가지겠지만, 마지막 날에는 집에 갈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때문에 마지막 날에는 별로 쓸 후기가 없다. 마지막 날 우리가 타야 하는 비행기는 오후 4시 20분에 출발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전에 삿포로역 주변에서 해야 할 쇼핑만 대충 하고 일찌감치 공항으로 향하기로 했다. 여친은 이미 돈키호테에서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잔뜩 샀다. 난 딱히 선물 줄 친구가 떠오르지 않아서 내가 먹을 것만 잔뜩 샀다가 "그래도 엄마 드릴 선물을 사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념품샵에 파는 건 대체로 식품류다. 과자나 식품 종류를 사다 드릴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좀 더 고급진 물건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茶) 종류를 선물하기로 했다. 일본 여행 내내 먹었던 우롱차나 호지차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상 2024.06.10

홋카이도에 다녀왔습니다만 - Day 3

이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속으로 생각한 게 있었다. 라멘, 스시 위주로 식사를 하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기왕이면 일본의 정체성을 외면하더라도 현지인들의 일상이 녹아든 음식을 먹고 싶었다. 그래서 여행 첫날에도 피자와 맥주를 먹었고 이후 삿포로에 넘어가서도 관광객 맛집은 가급적 피할 생각이었다. 예전부터 명동이나 을지로를 돌아다니면 캐리어 가방을 끌고 다니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그들을 겨냥한 식당으로 들어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비빔밥이나 불고기, 삼겹살 등을 파는 집이었다. 나는 그들을 볼 때면 "더 맛있는 집이 많은데"라며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내가 그들의 위치에 서고 나니 비빔밥, 불고기와 같은 위치에 있을 것 같은 라멘, 스시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이후 여행에서 적어도 한 번은 라멘..

일상 2024.05.28

(스포일러)'대결! 애니메이션' - 그래도 내일은 온다

영화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이 정해진 시간 동안 주인공은 '기-승-전-결'을 경험한다. 여기서 '결'에 이르면 영화의 시간, 이야기 주인공의 시간은 끝이 난다. 그런데 어떤 영화는 이야기가 끝이 나더라도 주인공의 삶이 어디선가 계속 될 거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나는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영화 '보이후드'는 이런 실험의 끝에 선 영화다. 같은 인물들의 성장을 담기 위해 12년동안 촬영한 이 영화는 영화적 시간과 삶이 가까워지도록 하는 일종의 실험이었다. 이 실험을 겪고 나면 영화가 끝나도 인물들이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런 기대는 삶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든다. '보이후드'에 비하면 '대결! 애니메이션'은 시작과 끝이 상당히 명확한 영화다. 이 ..

콘텐츠/리뷰 2024.03.18

[스포주의] '패스트 라이브즈' - 공간이 분리되기까지

기억은 매개체를 통해 명료해지고 생명력을 얻는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를 했던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장소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날 먹었던 음식이나 거리에서 흘러나왔던 음악, 입었던 옷, 액세서리 등 사소한 몇 개의 매개체가 기억을 더 명료하게 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하나의 매개체는 온전히 한 사람을 대체할 수 있다. 광화문에서 자주 데이트를 했다면 광화문이라는 장소는 사랑하는 연인으로 이어진다. 연인이 국물닭발을 좋아했다면 국물닭발이 곧 그 사람으로 기억된다. 기억력이 대단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기억이 명료해지기 위해서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공간'은 기억의 매개체로써 아주 탁월하다. 공간은 인위적으로 만든 매개체가 아니라 기억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매개체다. 텅빈 카페..

콘텐츠/리뷰 2024.03.04

(스포일러)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 - 신에게 버려진 재난에서 살아남기

불의의 사고로 외딴 곳에 조난당한 인물의 이야기는 꽤 전통이 깊다. 조난당한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는 진한 감동을 준다. 불의의 사고를 이겨내고 삶을 지켜내는 사람들의 드라마는 관객들에게 닥쳐온 각자의 현실 고난을 이겨낼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장르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영화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사고를 이겨낸 사람의 이야기가 존재해온 이유도 이 때문이다. 최근에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세상이 좁아지면서 관객들은 더 멀고 외딴 곳에서 조난당한 사람의 생존이야기를 요구한다. 오죽하면 급기야 지구 넘어 달이나 화성에 조난당한 사람을 구해내는 이야기까지 나오겠는가? 우주 한복판에 조난당한 사람이 스스로 살아남아 지구로 귀환한다던지, 화성에서 감자를 키우며 버텨서 살아남아 지구로 돌아..

콘텐츠/리뷰 2024.02.06

'덤머니' & '시민덕희' - 진짜 카타르시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엄밀히 따지면 카타르시스가 있어야 하는 이야기다.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꼬리칸의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켜 권력의 정점으로 향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준호는 권력구조 타파의 카타르시스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선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구조 속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보다 복잡한 알고리즘을 파헤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국 사회 멸망과 재건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회구조는 제 아무리 부당하고 부조리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도 시민의 힘으로 그것을 깨부수기는 어렵다. 수십, 수백년 이상 정착한 사회구조는 사람들의 무의식 안에 보다 정교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평범한 개인은 거대 사회구조의 부조리를 부수기 위해 끊임없이 싸운다. 거대한 사회 시스템에..

카테고리 없음 2024.01.29

[스포주의] '립세의 사계' - 스스로 구원하기

나는 시각적으로 만족을 주는 영화를 좋아한다. 이는 단순히 화려한 CG를 쓰거나 액션연출이 정교한 영화만을 말하지 않는다(물론 그런 영화들도 좋아한다). 빛과 어둠으로 빚은 그림같은 화면과 정성스런 미장센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이명세나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영화가 대표적이다. 그런 내 취향에 웰치맨 부부의 영화는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유화로 그린 애니메이션'이라는 다소 정신나간 발상으로 시작해 미쳐버린 장인정신으로 프레임 하나하나 그려낸 '러빙 빈센트'는 이전에는 본 적 없었던 황홀한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이 부부가 또 한 번 미쳐버린 장인정신을 보여주며 신작을 내놨다. 이번 작품에 대한 관객 반응은 전작 '러빙 빈센트'와 달리 엇갈리는 모양이다. 관객들이 벌써 유화 애니메이션에 적응한 건가 싶..

콘텐츠/리뷰 2024.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