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시골마을이었던 노보리베쯔를 떠나 조금은 도시에 가까운 하코다테에 도착했다. 나중에 삿포로에 가서 깨달았지만, 하코다테도 결국 시골은 시골이었다. 나는 하코다테에 대해 정보가 많지 않았다. 거의 유일한 정보라면 김종관 감독의 단편영화 '하코다테에서 안녕'에 담긴 풍경뿐이었다. 그 단편영화마저 눈이 소복히 쌓인 한 겨울의 하코다테였으니 4월말의 하코다테와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렇게 정보가 부족했으니 하코다테에서 뭘 할 지는 세세하게 정하기 어려웠다. 홋카이도에 거주 중인 지인은 하코다테의 아침시장을 추천했다. 시장 구경은 즐거운 일이다. 지역의 특산품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만, 현지인들의 삶의 방식이 가장 잘 담긴 곳도 시장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도 시장 풍경에 대해 기대하는 건 그런 '삶의 활력'들이었다. 하코다테 아침시장은 다행이 역에서 가까웠다. 그 말은 우리가 묵는 숙소에서도 가깝다는 의미다. 시장만 보고 가는 건 영 서운한 일이다. 다른 볼꺼리가 필요했다.
하코다테는 보기보다 넓은 도시다. 그래서 하루만에 도시 전체를 둘러보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하코다테역을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나눴다. 하코다테 북쪽에서는 고료카쿠 공원이 좀 궁금했다. 과거 요새로 쓰였던 별 모양의 공간이 공원으로 변했다. 벚꽃이 매력적인 곳이었고 근처에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도 있다고 한다. 사실 우리가 홋카이도를 방문했을 때는 벚꽃이 끝물이었다. 예년 같았으면 벚꽃이 만개했을 시기지만, 기상이변으로 벚꽃도 언제 나올지 갈피를 잡지 못해 평소보다 일찍 벚꽃시즌이 결정됐다. 벚꽃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4월 이야기'의 첫 장면처럼 만개하다 못해 쏟아지는 벚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하코다테역의 북쪽에는 고료카쿠 공원이 유일했다. 그게 아니라면 한참 거슬러 올라가 럭키삐에로 본점을 방문하는 것 정도(후술하겠지만, 럭키삐에로라는 패스트푸드점은 하코다테 여행의 핵심이 됐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하코다테역의 남쪽을 여행하기로 했다. 남쪽으로 가면 카네모리 아카렌가 창고를 시작으로 舊 하코다테구 공회당을 거쳐 로프웨이를 타고 하코다테산을 오를 수 있었다. 도보로 하루를 보내며 산책하기 좋은 코스였다. 여행 계획을 짜면서도 사실 이 공간에 꽂혔었다. 다른 것보다 개항지 특유의 이국적인 건축물과 그것이 이뤄낸 도시 풍경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건축디자인에 대해 뒤늦게 관심을 갖게 되고 나서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건물들이 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개항지 특유의 건축물은 인천이나 군산에 가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 구조와 건축물이 이뤄낸 조화는 인천이나 군산과 다른 하코다테만의 감성이 있었다. 특히 공회당 건물와 하리스토스 성당이 궁금했고 하코다테산에서 보는 전망도 궁금했다. 가성비를 아무리 따져봐도 여행은 북쪽보다 남쪽이 나았다.
하코다테에는 노보리베쯔에서 볼 수 없는 '트램'이 있었다. 하코다테역에서부터 은근히 신경쓰였던 '명탐정 코난: 100만 달러의 오릉성'은 트램에서도 이어졌다. 일본에서 이번에 개봉한 '명탐정 코난' 새 극장판은 배경이 무려 하코다테라고 한다. 그래서 도시 전체에서 스탬프 투어가 열리고 트램과 기차에 래핑되는 등 프로모션이 진행되고 있었다. 뜻밖에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마케팅을 어떻게 진행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했다. 무엇보다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스탬프 투어'는 한국의 영화 마케팅 체계가 어떤 형태로든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물론 '스탬프 투어'를 유도할만한 프렌차이즈 IP가 있어야 한다).
하코다테역에서 카네모리 아카렌가까지 트램을 타고 이동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트램이 낯설었던 탓에 우선 택시를 타기로 했다. 쾌적하게 카네모리 아카렌가에 도착하고 나니 역시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한 건 괴도 키드의 예고장이었다. 뭐라고 썼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때부터 "하코다테는 온통 코난이야!"라는 나의 절규가 이어졌다(나는 '명탐정 코난'에 별로 관심이 없다). 괴도 키드의 메시지를 외면한다면 하코다테 해안가의 이국적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개항지의 낡은 창고는 앤틱한 상가로 변했고 넓은 바닷가에는 감성을 자극하는 스타벅스 건축물과 (그 망할 놈의) 럭키삐에로가 있었다. 화창하게 맑은 날씨는 이국적인 해안가의 풍경을 더욱 돋보이게 해줬다. 그리고 럭키삐에로는 하코다테 내내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배우 후지이 미나의 유튜브를 통해 알게 된 럭키삐에로는 하코다테 현지의 패스트푸드점이라고 한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라멘, 텐동 등 일본을 방문한 관광객이 찾을 법한 음식은 피하고 싶었다. 한국을 방문한 일본 관광객들이 명동에서 불고기, 비빔밥을 먹는 것과 같아서 여행의 특별함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현지의 특색과 상관없이 현지인이 즐겨찾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홋카이도 지인은 럭키삐에로에 대해 '하코다테 시민들의 소울푸드'라고 말했다. 이번 여행에서 의도한 '음식'의 의도와는 꽤 잘 맞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숙소 근처의 럭키삐에로 점심을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줄이 좀 길었다. 여행을 떠나면서 어느 정도의 웨이팅은 각오했지만, 럭키삐에로는 하코다테 내에도 지점이 많아서 굳이 웨이팅을 해야 하나 싶었다. 그래서 카네모리 아카렌가 지점의 럭키삐에로를 가보려고 했지만, 그곳 역시 웨이팅이 난리가 났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이 음식은 반드시 먹어봐야겠다"라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당장은 배가 고팠던 만큼 다른 걸 먹기로 했다. '배고프면 예민해지는 두 사람'이 모인 만큼 하코다테에서 불미스러운 사태를 막기 위해 최대한 아무 집이나 들어갔다. 창고 주변에 위치한 아늑한 식당이었다. 여친은 초밥을 시켰고 나는 생선카츠와 밥을 시켰다. 노보리베쯔에서 먹은 피자와 치킨을 제외하면 일본스러운 식사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일본인들은 밥 먹을 때 숟가락을 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걸 실제로 접하니 조금 당황했다. 평소에도 밥 먹을 때 젓가락을 많이 쓰는 편이지만, 국을 뜰 때는 숟가락을 사용한다. 이날 식사에서 가장 당황한 건 '숟가락 없는 국그릇' 때문이었다. 생선카츠는 얼마 전 회사 국장과 저녁 미팅을 하러 갔던 을지로의 한 이자카야를 떠올리게 했다. 다른 이자카야보다 일본에 좀 더 진심인 그 가게에서 먹은 전갱이 튀김과 모양과 맛이 비슷했다. 조금 기름지고 간이 셌지만, 그럭저럭 맛있었다.
밥을 먹고 잠시 카페에 가기로 했다. 일본의 전통 카페 프렌차이즈는 코메다 커피라고 한다. 처음에는 그곳을 갈까 했지만, 카페에 마저 웨이팅이 걸린 걸 보니 조금 당황했다. 그래서 우선 스타벅스로 가기로 했다. 일본에서 스타벅스가 얼마나 인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만큼은 아닌 것 같다. 음료 구성도 달랐고, 무엇보다 한국 스타벅스에서 하루 일과처럼 사먹던 '콜드브루 트렌타'가 없는 건 충격이었다. 그렇게 스타벅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본격적으로 하코다테를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는 해안길을 따라 해상자위대 하코다테 기지대까지 걸었다. 이국적인 건물과 탁트인 바다의 조화가 인상적이었다. 자위대 기지대에 도착해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긴 언덕길이 보이고 그 꼭대기에 공회당 건물이 보였다. 길이 일자로 곧게 뻗은 탓에 길 끝에 있는 건물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공회당 건물은 하코다테에서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다. 그래서 우리는 '등산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언덕길을 걸었다. 완만한 언덕길을 얼마간 걷자 공회당 건물에 도착했다. 벚꽃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물은 푸른 몸통에 금테를 두른 부잣집 도련님을 연상시켰다. 모토마치 산간마을에서 가장 위엄이 넘치고 권위적인 장소라는 건 건물 외관에서부터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건물 내부를 구경해볼까 싶었지만, 웨이팅을 싫어하는 우리는 긴 줄을 보자마자 빠르게 포기했다. 구경할 곳이 아직 많았기 때문이다.
모토마치의 마을길은 아늑한 감성이 있었다. 흡사 부산 감천의 산복도로를 떠올리게 했지만, 그곳과 다른 정갈함이 있었다(어릴 때 부산 감천에서 자랐던 탓에 그곳은 나에게 '가난의 온상'과 같았다). 마을길을 지나면서 하리스토스 성당과 모토마치 성당, 히가시혼간지 하코다테별원 건물을 볼 수 있었다. 서양식의 성당과 일본식의 히가시혼간지 건물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은 아이러니하게 보였다. 나는 이런 아이러니를 좋아한다. 이 풍경이야말로 하코다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마을길을 좀 걸어가자 로프웨이를 탈 수 있는 승강장에 도착했다. 하코다테의 야경은 흔히 '세계 3대 야경'이라고도 한다(누가 정했는지는 모르겠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봤을 때는 "황령산전망대랑 뭐가 다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남산전망대는 차치하더라도 황령산전망대와는 차별점이 있기를 바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코다테산은 남산과 황령산을 섞은 느낌이었다. 남산타워와 같은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황령산에서 내려다 본 부산앞바다 같은 풍경을 선사했다. 생각보다 일찍 올라온 탓에 해가 질 때까지 머물지는 못했지만(이럴거면 공회당 내부라도 보고 올까 싶었지만), 나름 매력이 있었던 하코다테산에서의 '주간 풍경'을 둘러보고 산을 내려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동네를 조금 걸어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트램을 타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모토마치에서 벗어난 동네는 말 그대로 '사람 사는 동네'였다. 관광지와는 무관한 곳이었지만, 여기서도 한국과 다른 매력적인 건축물들이 타국의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일본이라고 아파트(맨션)이 없지는 않겠지만, 한국과 같은 대단지 고층아파트가 보이지 않는 마을의 풍경은 꽤 인간적이다. 2층집들로 이뤄져있어 높이가 일정하다는 일관성은 있지만, 그 와중에도 집마다 개성이 있어서 재미있었다. 오래된 집은 그 나름대로의 정서가 있었고 새 집은 독특한 건축양식을 관찰할 수 있었다. 트램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보이는 타코야키집이 있었다. 사람이 북적이는 걸 보고 맛있어 보여서 즉흥적으로 사먹어봤다. 타코야키를 즐겨 먹지 않던 나는 그런대로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여친은 나중에 말하길 "그거보다 맛있는 타코야키 오사카에 많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오사카가 궁금하진 않았다(한국인이 많다고 하니).
버스와 같은 트램을 타고 숙소에 복귀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숙소 근처에는 다이몬 요코초라는 골목이 있었다. 상술한 후지이 미나 유튜브에도 등장한 이 곳은 작은 선술집들이 밀집한 골목이었다. 내키면 한잔 할 각오가 있었고 꽤 매력적으로 보이는 가게들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느 블로거는 웨이팅이 없는 곳을 가려다가 라무진에서 양고기를 먹었다고 했다. 그날은 무거운 걸 먹고 싶지 않아서 양고기는 먹지 않았다. 결국 다이몬 요코초는 그냥 구경만 하고 나와서 길을 걸었다. 어둑한 밤길에는 유난히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차도 별로 다니지 않았다. 서울의 북적이는 밤거리만 보다가 인적이 드문 길을 보니 당황스러웠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전주에 가더라도 관광지만 벗어나면 일찍 조용해지는 편이다. 그런데 하코다테는 그보다 더 일찍 조용해졌다. 우리는 저녁도 먹기 전이었다.
밤길을 조금 걷자 꽤 큼직한 돈카츠집이 보였다. 관광객을 겨냥한 맛집이 아닌 현지인들의 한끼를 해결하기 위한 가게처럼 보였다. 꽤 오래 걸었던 탓에 우리는 고민하지 않고 돈카츠를 먹기로 했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은 키오스크로 주문을 마치코 음식이 등장하자 조금 당황했다. 한국보다 양이 적었기 때문이다. 소식(小食)을 하는 일본인의 문화에 새삼 당황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현지감성을 내고 싶어서 돈카츠에 우롱차를 시켰다. 현지인들이 그렇게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메뉴에 있으니 시켰다. 기름진 카츠와 우롱차는 꽤 조화가 괜찮았다. 가능하다면 한국에서도 시도해보고 싶은 조합이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도착했다. 돌아오는 길에 대형마트에 들러서 일본의 식료품과 술도 구경했다. 그리고 숙소에서 밤에 마실 술과 안주를 사왔다. 그날은 숙소에서 먹은 술과 안주는 모두 '완전히 실패'했다. 여친이 한국에서 간식으로 사왔다는 어포튀각(a.k.a. 꾸이꾸이)이 제일 맛있었다.
하코다테의 밤은 대단히 심심하다. 다이몬 요코초에서 술을 마실 게 아니라면 밤에 즐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채널도 몇 개 나오지 않는 숙소의 TV를 보며 여친과 대화를 나누다가 일찍 잠을 청했다. 다음날인 4월 28일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고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쿄에 다녀왔습니다만... Day 1 (5) | 2024.12.18 |
---|---|
홋카이도에 다녀왔습니다만 - Day 5 (마지막) (0) | 2024.06.10 |
홋카이도에 다녀왔습니다만 - Day 4 (1) | 2024.06.05 |
홋카이도에 다녀왔습니다만 - Day 3 (1) | 2024.05.28 |
홋카이도에 다녀왔습니다만 - Day 1 (1) | 2024.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