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행이 마찬가지겠지만, 마지막 날에는 집에 갈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때문에 마지막 날에는 별로 쓸 후기가 없다. 마지막 날 우리가 타야 하는 비행기는 오후 4시 20분에 출발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전에 삿포로역 주변에서 해야 할 쇼핑만 대충 하고 일찌감치 공항으로 향하기로 했다. 여친은 이미 돈키호테에서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잔뜩 샀다. 난 딱히 선물 줄 친구가 떠오르지 않아서 내가 먹을 것만 잔뜩 샀다가 "그래도 엄마 드릴 선물을 사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념품샵에 파는 건 대체로 식품류다. 과자나 식품 종류를 사다 드릴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좀 더 고급진 물건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茶) 종류를 선물하기로 했다. 일본 여행 내내 먹었던 우롱차나 호지차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품류가 그렇게 많았던 기념품샵에도 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 삿포로역 바로 옆에 위치한 백화점 식품코너로 향했다. 티백 형태의 괜찮은 차를 파는 곳이 있길래 넉넉하게 샀다. 여행을 다녀온 후 어머니께 여행가서 사온 차와 핸드크림을 선물로 드렸다. 반응은 좀 미지근했다. 어머니는 녹차를 보자 '하동녹차' 이야기를 하셨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랑 그렇게 사이도 안 좋고 투닥거리셨으면서도 하동 이야기를 꺼내신다. 하동은 아버지의 고향이자 어머니에게는 '시댁'인 곳이다. 하동녹차가 맛있기는 하다.
(다시 여행 이야기로 돌아가서) 백화점 쇼핑을 마치고 바로 옆에 서점으로 향했다. 삿포로역 바로 옆에는 키노쿠니야 서점 삿포로 본점이 있다. 스프커리 먹으러 갈 때 지나가면서 한번 들러봐야지 했던 곳이다.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일본책을 읽으려고 산 건 아니었다. 그냥 소장용으로 살만한 책이 있나 싶어서 갔다. 원래 글 읽는 걸 안 좋아해서 (산만해서) 그림·사진이 많은 책을 좋아한다. 여담이지만, 글을 읽고 하는 상상보다 사진을 보고 이야기를 상상하는 게 더 재미있다. 또 다른 이유는 어릴 적 기억 때문이다.
부산에서 살던 어린 시절에 보수동 책방골목에 종종 놀러갔다.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전에는 일본의 책이나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때 책방골목에는 수입일서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일본에서 직수입한 만화책이나 일러스트 화보가 있었고 애니메이션을 비디오로 복사해 '불법으로' 판매했다. 일반 서점의 책보다 비쌌지만, 어릴 때 봤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일러스트 화보를 보는 일은 재밌었다. 그러니깐 일본의 서점에서 사고 싶은 것은 괜찮은 사진집 내지는 애니메이션 일러스트 화보였다. 매력적인 책이 몇 권 보이기는 했다. 특히 서점 2층의 영화서적 코너에서는 살짝 구매욕구를 자극하는 책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 이건 사야돼" 정도의 책은 보이지 않았다. 이 경우에는 주변에서 누가 말리면 바로 구매를 포기한다. 여친이 구매를 말려서 구매하지는 않았다.
서점에서는 이번 여행 내내 느꼈던 특이사항 하나를 체감할 수 있었다. 일본은 야구 강국이다. 그래서 유명한 선수가 많다. 당장 생각나는 이름도 스즈키 이치로, 다르빗슈 유 등이 있다. 그럼에도 현지에서는 오타니 쇼헤이에 대한 인기가 굉장하다. 현지 주민들이 오타니에 대해 갖는 관심이야 지역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더라도(미국으로 가기 전 오타니의 소속팀은 니혼햄 파이터스다) 스포츠잡지 대부분에서는 오타니가 표지모델이다. 거의 우리나라 손흥민을 보는 것 같다. 한류 콘텐츠에 대한 관심도 대단했다. 잡지 코너에서는 한쪽 섹션을 아예 한류 콘텐츠 관련 잡지로 분류를 해뒀다. 정작 열차나 버스 안내방송에서는 한국어를 들을 수 없었지만(우리나라 대중교통 안내방송에는 일본어가 나온다), 한류 문화에 대한 관심은 꽤 대단했다. 서점에서는 그 정도만 체감하고 나왔다.
우리는 일찌감치 공항으로 넘어가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신치토세 공항에는 극장도 있고 나름의 식당들이 있었다. 수속을 밟는 시간을 고려하면 꽤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일단은 조금 여유가 있어보이는 스파게티집으로 들어갔다. 메뉴를 보니 나폴리탄도 있었다. 원래 나폴리탄이라는 요리를 알지는 못했다. 여친 때문에 알게 된 드라마 '심야식당'에서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접한 게 전부였다.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한국에서는 가끔 먹어봤지만, 일본에서는 처음이었다. 한국에서 먹었던 나폴리탄보다는 담백하고 깔끔했다. 강한 인상을 준 요리는 아니었지만, 부담없이 즐기기에는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수속을 밟은 뒤 '여행객의 국룰'이라는 공항면세점 쇼핑을 했다.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여전히 사고 싶은 게 없었다. 고심 끝에 '술로 만든 사탕'과 '술안주로 좋은 로이스 초콜릿'을 샀다. 여행 다녀온지 한달이 넘었는데 두 물건은 아직 개시도 안했다. 쇼핑을 마치고 비행기에 탈 준비를 했는데 비행기가 기내 정비로 연착을 했다. 여행 마지막 날인 이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엄청나게 쏟아졌다. 그래서 혹시 기상상황 때문에 연착인 건가 생각했다. 여친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난 모든 상황이 처음이다. 다행히 30여분 연착한 뒤 비행기는 정상적으로 이륙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행은 끝이 났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일본의 건축문화였다. 무엇보다 '대단지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제각각으로 생긴 집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일본에는 100년 이상 된 가게들이 수두룩하다. 그만큼 건물들도 오래됐다는 의미다. 신분과 직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운명이 가혹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오래된 것들이 지켜지는 모습은 (관광객 입장에서) 보기 좋았다. 건축물에서도 이런 생각들이 그대로 묻어났다. 노보리베쯔나 하코다테에서는 정말 100년 가까이 된 것 같은 건물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삿포로에서 갔던 야키니쿠집 '아가씨'도 가게 자체는 60년이 된 것처럼 보였다. 건물뿐 아니라 문화에서도 이런 게 잘 묻어났다. 노보리베쯔에서는 무려 창문을 수동으로 올려야 하는 택시가 아직도 운행되고 있었다. 삿포로에서도 사이드미러가 곤충 더듬이처럼 차체 앞부분에 달린 차들이 종종 보였다. 옛날 차들이 주로 이렇게 만들어졌다.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일본의 문화는 때로 놀림감이 된다. 예를 들어 방송에서 CG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부분을 판넬이나 그림으로 대체한다. 공무원들이 내부 업무용으로 현황판을 만들 때도 옛날 방식을 고수한다. 라멘집에서는 나름 '키오스크인 것'이 존재하지만(정확히는 식권 자판기), 뭔가 간편해보이진 않는다. 매장에서는 여전히 카드를 받지 않는 집이 많고 동전이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다. 여친은 여행이 끝날 때쯤 수북히 쌓인 동전을 처치하느라 애를 먹었다. 한국에서는 캐치테이블로 식당에 대기를 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닥치고 줄을 서야 한다.
옛 문화를 고집하는 삶의 태도는 관광객에게는 독특한 관광상품이 되지만, 주민들에게는 불편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편의점에서 자동으로 결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했지만, 현금을 넣어야 하는 경우다. 또 열차를 이용할 때는 여전히 종이 승차권을 고집하는 경우도 해당된다. 혁신을 하더라도 옛것을 고수하면 온전한 혁신이라고 하기 어렵다. 과거 세계 전자산업을 주름잡던 일본이 한국, 대만, 중국에 주도권을 내주고 부품, 소재 중심으로 재편된 것도 같은 이치다.
결국 일본에 남은 건 관광업밖에 없다. 현재 일본은 '오버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골든위크가 시작할 때 홋카이도에 갔어도 주말 명동보다 한산해서 골든위크라는 걸 체감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등 비교적 한국에서 가기 쉬운 도시는 미어터진다고 한다. 일본은 사실상 관광업 중심의 나라가 됐다. 관광업 중심의 나라가 된 것은 그들의 문화가 빚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제조업이 진작에 주저 앉았어도 콘텐츠는 살아남아 세계를 주름잡았기 때문이다. 이번 일본여행에서는 일본의 문화에서 그들의 제조업이 왜 주저 앉았는지, 관광업이 왜 성행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홋카이도 여행에 대해 정리하자면 노보리베쯔와 하코다테, 삿포로를 다녀오면서 각 도시마다 '못 간 장소' 하나씩은 남겨두고 온 것 같다. 노보리베쯔에서는 '곰 목장'과 '도야호', 하코다테에서는 '고료카쿠 공원', 삿포로에서는 '애스콘필드', '삿포로 맥주 박물관', '시로이코이비토 공원' 등이다. 어차피 다 둘러볼 수 없었던 만큼 장소를 남겨두고 오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런데 남겨두고 온 장소를 생각하면 언젠가 또 가도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만큼 여행이 즐거웠다는 의미다.
P.S) 일본여행을 갈 때 환전을 얼마나 해야 할 지 몰라서 4박5일 기준 10만엔을 환전했다. 끝나고 나니 절반 정도 남았다. 일본여행을 또 가게 만드는 여운과 같은 건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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