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기획

불닭국밥의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 11편

불닭국밥 2024. 12. 19. 13:08

※ 본래 10편을 고르는게 국룰이지만 본인의 결정장애 영향으로 11편을 선정했습니다. 


'추락의 해부'
- 나는 '육각형의 영화'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구조가 탄탄하고 이야기에 몰입감이 넘쳐 어느 한구석도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영화는 리뷰를 제대로 쓰기도 어렵다. 빈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추락의 해부'는 '육각형 영화'에 가깝다. 차분하고 묵직하지만, 이야기는 생동감이 넘치고 끝내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치닫는다. 이야기의 긴장감과 재미도 충만하며 뛰어난 미장센과 연기를 자랑한다. 영화의 사회적 책임에도 충실하며 오랜 시간 회자될 화두를 던진다. 심지어 개도 명연기를 펼친다. 근래 보기 드문 명작이다. 

'챌린저스'
- 어떤 상업영화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말 그대로 "이게 섹스지"의 전형을 보여준다. 스포츠의 역동성과 승부에서 오는 드라마를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모범사례다. 오죽했으면 "루카 구아다니노가 '슬램덩크'를 만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기도 했다.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뜨겁게 흥분시킨 영화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 '매드맥스'는 '분노의 도로'가 익숙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1979년 '매드맥스' 1편부터 기억한다면 이 시리즈의 근본은 복수극이었음을 알 수 있다. '퓨리오사'는 '매드맥스'의 근본인 복수극으로 향한다. 조지 밀러는 새로운 시대에 에너지 넘치는 액션영화가 가야 할 지향점을 찾아낸다. '매드맥스'는 가장 긴 시간을 아우르는 프렌차이즈로 재탄생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 조나단 글레이저는 '언더 더 스킨'을 통해 뛰어나고 독특한 연출을 선보인 바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오히려 미장센으로 함정을 판다. 뛰어난 미장센에 압도당해서 보다보면 소리가 보여주는 진실에 귀를 기울이지 못할 수 있다. 소리가 보여주는 이 이야기의 실체는 같은 소재를 다룬 그 어떤 영화보다 오싹하다. 공포의 실체는 평화로운 가족의 이미지와 소리가 합쳐지며 완성된다. 이 영화는 그 자체로 거대한 몽타주다. 

'수유천'
- 이제 홍상수의 세계는 누구도 다다를 수 없는 어떤 영역으로 향했다. 그의 예술적 지향점에는 자본도 필요없고 대형 스타와 거물급 스태프의 재능기부도 필요없다. 그 많은 것을 버리고 버려내며 홍상수는 도인이 된다. 또 홍상수를 보고 배운 독립영화 작가들에게도 더 나아간 신선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제 홍상수의 영화는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영역에 이르렀다. 

'더 킬러스'
- 이명세의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영화는 나에게 '올해의 한국영화'다. 그런데 여기에 몇 명의 감독이 더 참여한다. '공간'이 사실상 주인공인 이 옴니버스 시리즈는 태초에 존재했던 영화적 즐거움을 되새겨준다. 영화의 즐거움은 초현실적 미장센과 독창적인 소재에서 비롯된다. '더 킬러스'는 잠들었던 씨네필의 피를 끓게 만드는 영화다. 이미지와 이야기를 즐기는 이 경험, 이게 바로 영화가 아니던가. 

'아노라'
- '아노라'는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새로운 게 보인다. "왜 숀 베이커의 세계에서 이상향은 디즈니월드인가", "왜 끝이 뻔히 보이는 로드무비에 열광하는가"로 시작해서 그 다음에 이르면 예상치도 못한 위로를 받는다. '아노라'는 화려한 음악과 폰트의 오프닝 타이틀로 시작해 배경음만 남고 기본폰트가 돼버린 엔딩 타이틀로 끝을 맺는다. 여기에 더해서 보면 영화의 도입부에는 호객행위를 하는 애니(마이키 매디슨)의 가짜 웃음을 보여주지만, 끝에 이르면 영화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기대 엉엉 우는 아노라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애니'로 시작해 '아노라'로 끝난다.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노라'는 성장영화다. 누구나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성장영화.

'스퍼마게돈'
- 올해 부천영화제에서 본 이 노르웨이 애니메이션은 정말 원초적으로 재미있다. 삶에 대한 의지가 부족한 정자가 고환을 떠나 온갖 난관을 이겨내고 난자로 도달하는 이 로드무비는 진정한 의미의 '인사이드 아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꽤나 현실적인 결말에 이르면 이 영화는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성교육 교재가 된다. 어느 영화 수입업자건 이 영화의 국내 개봉은 추진할만한 가치가 있다. 

'아이미타가이'
- 얼마전 곤 사토시의 2007년 작품 '크리스마스에 기적이 일어날 확률'을 다시 봤다. 우연에 우연이 더해져 만들어 낸 인간관계와 그에 동반한 이야기는 계속 보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아이미타가이'는 우연과 관계가 만들어 낸 따뜻한 이야기다.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을 바탕으로 풀어낸 이 이야기는 관객에게 관계의 소중함을 일꺠워준다. 그리고 '우연'이라는 치트키를 써서 만든 이야기임에도 날로 먹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착한 영화를 안 좋아한다면 다소 거북할 수 있지만, 어쨌든 이야기가 재미는 있다. 

'나미비아의 사막'
-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들을 정리할 때 이 영화는 그렇게 돋보이는 작품은 아니었다. 그냥 이상한 여자애가 나오는 이상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이상한 여자애가 자꾸 생각난다. 호감이 가는 애도 아니고 오히려 비호감에 가까운 녀석이지만, 자꾸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토록 오래 기억에 남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90년대생 감독이 만든 재기발랄하고 독특한 연출과 카와이 유미가 연기하는 '이상한 여자애' 캐릭터는 가끔 생각나서 다시 꺼내보고 싶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정식 개봉(내지는 VOD 출시라도)을 강하게 주장해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 '우연과 상상'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관람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이 작가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모르겠다. 매번 다른 영화를 만들면서 매번 다른 깊이를 보여준다. 확실히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차가운 설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비정하고 차가운 이야기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작가의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