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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의 끝없는 싸움: 자본 계급을 조롱하다

불닭국밥 2023. 7. 11. 18:56

마르크스의 계급론은 불평등을 상징하지 않는다. 계급의 투쟁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성장동력과 같은 역할을 한다. 마치 '설국열차'처럼 한정된 공간 내에서의 인구 과밀을 해소하기 위해 적당한 계급 투쟁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기관사 공백을 최소화해 열차를 계속 운행시킨다. 단지 인구과밀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만이 아니더라도 계급투쟁은 정체된 사회의 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 여기에는 지도자가 바뀜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정치 이념의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명사회에서 '계급'은 로마 시대부터 존재했었고 그것은 어떤 정치적 이념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계급은 주로 직업이나 신분, 출생에 기인했다. 왕족부터 시작해 귀족, 종교계, 상인, 노비 등. 부모의 신분은 그 자녀의 신분을 태어날 때부터 결정지었다. 꼬리칸에서 태어난 아이는 꼬리칸이 그 집인 것과 같다. 민주주의를 갈망한 몇 번의 혁명 이후 세계 많은 국가에서는 출생이 계급을 결정짓지 않게 됐다. 

군주제의 몰락 이후 이를 대체한 것은 민주주의다. 다수의 의견이 모여 의사를 결정하는 이 사회에서는 누구나 다수에 속할 수 있고 누구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누구나 돈을 벌고 부자가 될 수 있다. 이를 자본주의라고 부르며 이런 사회가 만들어진지는 매우 오래됐다.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의 역사가 깊어지면서 여기에서 오래된 무언가가 자라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어떤 정치 이념보다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계급이다. 현대사회를 조금 극단적으로 정의하자면 "누구나 돈을 벌 수 있지만, 누구나 성공할 수 없는 사회"다. 자본주의의 구조는 돈이 돈을 벌고 실패가 실패를 낳는 형태로 진화했다. 이는 여러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병폐다. 자본주의 속 계급에 대한 분노는 최근 몇 개의 영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들 영화들은 지역색을 강하게 가지고 있음에도 세계적으로 호응을 얻고 있다. 이 사실만으로 자본주의의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곳곳에 뿌리 깊게 박혀있음을 알 수 있다. 

'기생충'의 제작발표회에서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의 칸 영화제 수상 가능성에 대해 (겸손인지 객관적 시신언지 알 수 없지만) 부정적으로 봤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이 한국의 실정에 맞춘 영화인 만큼 지역색이 강해서 해외의 공감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틀렸고 '기생충'은 칸 황금종려상과 오스카 작품상을 동시에 거머쥔 흔치 않은 영화가 됐다. '기생충'은 반지하라는 독특한 주거구조와 언덕길 호화주택으로 자본주의 속 계급을 시각화했다. 그리고 이것을 넘나드는 '냄새'로 계급 투쟁을 대신했다. 냄새가 결국 경계를 넘어섰을 떄 일어나는 혼돈이 영화의 핵심이 됐고 그 이후 지하실에 밀봉된 냄새와 아무 일 없이 잊혀진 투쟁의 흔적을 담고 있다. 계급 투쟁은 '설국열차'처럼 혁명적이고 과감할 수 있다. 그러나 언덕 높은 곳의 호화주택에 사는 집에게 그것은 그저 고약한 냄새에 불과하다. '기생충'은 계급의 벽이 허물어지려는 혼돈의 파티를 담고 있지만, 계급의 벽은 지하실의 문처럼 두껍고 견고했다. 

이처럼 견고한 벽에 막혀버린 투쟁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좌절감이었다. '기생충'이 그것을 시각화하고 냉소적으로 비웃기까지 하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마치 이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좌절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무엇이 너희를 좌절시켰는지 아느냐"라고 가르쳐주는 것과 같다. 계급에 대한 좌절과 냉소를 담은 '기생충'은 평단뿐 아니라 (한국을 중심으로) 상업적으로도 괜찮은 성과를 거뒀다. 이는 다른 계급에 속한 사람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켰다는 점에서 통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생충'을 보며 의아했던 지점은 이 영화에는 악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택(송강호)네 가족은 그저 일자리가 필요했을 뿐이며 법적으로는 사기와 횡령 정도의 죄가 적용된다. 그나마도 피해액을 따지면 크지 않은 규모다. 게다가 박사장(이선균)의 집에서 술판을 벌이던 기택네 가족은 거실을 벗어나 부부의 침실로 향하는 등의 일을 벌이지 않는다. 박사장네는 엄밀히 따지면 이 영화의 피해자 집단이다. 계급의 위치를 상기시키는 행동이 일부 나오긴 했지만, 거기에는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살아온 방식에 충실했을 뿐이다. 사실상 모두가 피해자나 다름없는 이 영화에서 자본주의가 만든 시스템은 관객들과 함께 카메라 뒤에 서서 인물들을 비웃고 있다. 시스템과 동일시 된 관객의 관음증은 쉽게 치유되기 어렵다. 

'기생충' 이후 얼마 뒤 루벤 외스틀룬드의 '슬픔의 삼각형'은 자본주의 속 계급에 대한 냉소를 토하듯이 쏟아낸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젊은 남녀는 성별로 나눠져 갈등을 벌인다. 그러다가 그들은 성별의 영역이 무의미한 상류사회(크루즈 유람선)에 초대된다. 여기에는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를 조롱하는 상류층이 있고 이념에 사로잡혀 자기 책무를 등져버린 선장도 있다. 결국 시대를 반영하지 못한 그릇된 정치쇼가 벌어지던 날 밤, 사람들은 지도자의 정치쇼를 토해내기 시작한다. '슬픔의 삼각형' 속 상류사회는 투쟁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투쟁이 있었다면 그 사회는 유지됐을지도 모른다. 그저 천박한 자본주의와 현업을 등져버린 이념적 갈라치기가 배를 몰락시켰고 여기에 해적들이 수류탄을 던진다. 그리고 도착한 무인도에서는 새로운 계급이 형성된다. 일하는 자는 지도자가 되고 그에게 굴복하는 자들이 등장한다. 현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이념적 갈등은 무인도에서 아무런 의의도 갖지 못한다. 지쳐버린 연인처럼 보였던 젊은 남녀는 지도자의 성착취 아래 절망하고 갈라진다. 그러다 계급사회의 끝이 보이기 시작할 때 지도자는 계급을 지키려는 선택을 한다.

'슬픔의 삼각형'은 몇 번의 장소 이동을 거친다. 화려한 패션계에 종사하는 젊은 남녀는 실제로 화려하거나 풍요롭지 못하다. 패션쇼에서는 몇 가지 구호가 등장하지만, 정작 그 구호 아래서 워킹을 하는 모델조차 구호와 다른 무언가를 주장한다. 패션과 광고는 자본주의의 가장 정점에 있다. 실제로 전세계에서 자본의 양극화가 심해지자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재산순위 1위가 됐다. ICT 기업의 오너가 주로 차지하던 이 자리를 명품 패션브랜드의 회장이 차지하면서 기술적 안락함보다 과시욕구가 더 커졌음을 의미한다. 중산층은 사라지고 상류층을 갈망하는 하류층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패션계를 지나 유람선에 도달했을 때 계급은 다소 무의미해진다. 젊은 연인은 상류층과 대화를 나누는 위치에 이르렀고 상류층도 이들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인다. 그 내면에는 자본계급에 따른 거리감이 나타나지만, '기생충'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천박한 상류층에 어울리려는 젊은 연인의 모습이 다소 안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인피니티 풀'에는 핵심이 되는 시스템이 등장한다. '톨카'라는 가상의 국가에는 관습법이 있다. 만약 누군가 사람을 죽일 경우 피해자의 가족이 가해자를 죽이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관광 진흥을 위해 외국인 관광객과 외교관에게는 이를 면책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바로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복제해 그를 죽이도록 하는 일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큰 돈이 든다. 가난한 작가였던 제임스(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부자 아내인 엠(클레오파트라 콜먼)과 톨카의 휴양지에 이른다. 여기서 가비(미아 고스)의 부부와 어울리게 되고 이들의 권유로 리조트 밖으로 나가게 된다. 결국 사고를 저지른 제임스는 경찰의 권유로 자신의 복제인간을 만들어 그를 죽이게 된다. 이런 시스템은 부르주아들의 도덕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결국 부르주아들은 폭력과 살인 등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 자신의 복제인간을 사서 죗값을 치르는 일을 반복한다. 제임스와 어울리는 부르주아들은 이것에 익숙하지만, 원래 가난한 작가였던 제임스는 여기에서 큰 혼란을 느낀다. '인피니티 풀'은 부르주아의 폭력적인 만행과 제임스가 느끼는 혼란을 다루고 있다. 

'인피니티 풀'에서 부르주아의 일상은 마치 마약처럼 쾌락적이다. 이 쾌락은 도덕성을 상실한 자유로움에 기인하며 이를 얻기 위해서는 돈이 든다. 영화는 이런 쾌락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상의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 실제로 도덕성을 상실하는 쾌락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마약이나 향정신성 의약품을 일컽는 말이 될 것이다.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이 영화에서는 빌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부르주아에게 귀속돼있고 결국 제임스는 그 쾌락에 중독됐다는 점에서 '인피니티 풀'은 시스템과 부르주아를 악역으로 지목한다. 이는 '기생충'이나 '슬픔의 삼각형'과는 다른 태도다. 계급은 불가피하고 바꿀 수 없는 것이지만, 그곳에 속한 사람의 도덕성에 따라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다. 마치 부르주아의 삶의 태도에 변화를 요구하는 구호처럼 들린다. 그러나 돈이 가져다 주는 쾌락은 무엇보다 달콤하고 자극적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 결국 쾌락을 갈망하는 인간의 태도가 빌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인이 된 이후 몇 번의 선거를 치렀다. 정권이 바뀌는 현장도 목격했고 정권이 재창출되는 현장도 봤다. 정권이 바뀌면 좋은 세상이 올 것처럼 선동하는 정치 이념은 부르주아를 갈망하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마약과 같다. 그러나 늘 그랬듯 갈망은 몰락을 불러왔다. 이념의 달콤함은 현실감각을 떨어뜨렸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뚫을 수 없는 벽에 가로막혀 지하실에 밀봉됐다. 간혹 우리는 흙수저에서 금수저로 인생을 역전한 성공'신화'에 대해 듣는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신화'에 불과하다. 흙수저의 대부분은 부모에게 물려 받은대로 흙수저로 살 수 밖에 없다. 간혹 금수저로의 성공신화를 일으킨 인물이 있더라도 이는 '인피니티 풀'의 제임스처럼 상류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초심자에 불과하다. 계급은 견고하고 우리 삶을 가로막을 것이다. 소수의 성공신화는 달콤한 마약처럼 자본에 더 굴복하게 만들 것이다. 어떤 투쟁도 성공하진 못할 것이다. 이념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저 새로운 계급이 등장할 뿐이다. 마치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조롱하고 저항하던 흑인이 아시아인을 상대로 인종차별하는 것처럼 계급의 평등보다는 자신보다 더 낮은 새로운 계급의 등장할 갈망할 뿐이다. 이것이 상류사회를 향한 프롤레타리아의 갈망으로 나타났다. 이는 어떤 곳에서는 투쟁으로, 어떤 곳에서는 명품에 대한 오픈런으로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제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계급에 대한 조롱은 기생충처럼 끈질긴 감옥에 대한 최대한의 저항이다. 뚫을 수 없는 벽에 난 작은 창틀과 같다. 누군가는 계급에 저항해 투쟁하고 싸울 것이다. 이는 문명사회 이후 인류의 역사에서 늘 있어왔다. 그러나 '설국열차'처럼 계급 투쟁은 사회를 구성하게 하는 원동력일 뿐 정말로 계급을 없애고 모두를 평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과거 군사독재에 저항해 민주주의를 쟁취한 운동권 인사들이 지금은 새로운 계급사회의 상위에 속한 것도 이와 같다. 이 때문에 계급에 대한 조롱은 계속돼야 한다. 그것 자체가 계급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진 못해도, 투쟁에 불을 지피진 못해도, 먼 미래에 인류는 계급의 영역 안에서 최대 다수가 행복을 누리는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과거에 비하면 계급의 영역 안에서 꽤 많은 사람이 행복을 찾고 있다. 여전히 갈 길은 멀고 새로운 갈등이 생기고 있긴 하다. 그래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합의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영화들은 이런 합의를 위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