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의 '응답하라'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디지털의 시대에 20세기를 추억했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살아본 입장에서 내가 기억하는 20세기는 썩 낭만이 있었다. 홍콩할매 같은 시덥잖은 괴담이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휴거 같은 것들을 믿었다. 2000년이 다가오기 전에는 'Y2K' 괴담이 등장했고 기업들이 나서서 이를 걱정할 정도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거꾸로 들으면 악마를 숭배하는 메시지가 나온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도 믿었다(이 이야기는 MBC '뉴스데스크'에도 나왔다). 지나고 나니 20세기의 사람들은 꽤 순박했던 모양이다. 순박함이 낭만을 대변하진 않는다. 그러나 순박함은 조금의 불편함에서 온다. 정보를 습득하는데 조금은 불편했기에 사람들은 상상으로 정보의 부재를 채웠고 그것은 괴담, 혹은 낭만으로 나타났다. 순박함은 낭만으로 향하는 도구였다.
21세기가 시작되고 20여년이 지난 지금, 낭만은 어쩌면 꽤 사치스런 도구일지도 모른다. 과거보다 경쟁은 더 치열해졌고 기후변화에 바이러스가 더해져 이제는 유치원생조차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순박함의 또 다른 이름인 정직함은 더 이상 경쟁에서 살아남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타인을 집어삼키면서 거대한 불가항력에 저항해 살아남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현재의 삶은 더 처절하게 살아남거나, 아니면 숨쉬고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납작 엎드리는 수밖에 없다. 이런 시기에 낭만을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마치 한달 가까이 브로콜리에 닭가슴살만 먹다가 날 잡고 끓인 라면과 같다. 지난해와 올해, 나는 낭만이 철철 넘치는 두 영화를 봤다. '탑건: 매버릭'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이들 두 작품은 2023년을 사는 사람들이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탑건'은 1986년 영화다. 이 작품에 대해 굳이 장르를 표현하자면 '청춘영화'다. '탑건'은 전투기 조종사 양성학교에 모인 젊은 전투기 조종사들이 갈등하다 우정을 나누고 사랑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청춘스타였던 톰 크루즈와 발 킬머, 멕 라이언 등이 출연했고, 영국 출신으로 빠른 템포에 감각적인 영상이 강점인 토니 스콧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탑건'은 이전의 전투기 영화처럼 단순히 '전투기를 타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전투기를 타고 있는데 그림이 멋짐'을 표현해낸다. 바로 직전의 전투기 영화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파이어폭스'와 비교해보면 얼마나 확연하게 달라졌는지 바로 알 수 있다. '탑건'이 가진 영화적 낭만은 '멋'에 있다. 토니 스콧은 '탑건' 이외에 '폭풍의 질주'를 만들었다('폭풍의 질주'는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처음 만난 영화기도 하다). 이어 '마지막 보이스카웃', '트루 로맨스', '맨 온 파이어' 등 템포가 빠르고 멋있는 화면이 강점인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탑건: 매버릭'은 그 멋을 고스란히 계승한다. 36년이 흘러도 여전히 멋있는 매버릭(톰 크루즈)부터, 그 옛날 청춘들의 멋을 재연한 것 같은 루스터(마일즈 텔러)와 행맨(글렌 파웰)까지. 온 사방에 그 시절의 멋을 배치해둔다. 지금의 관객들이 보기에 '탑건: 매버릭'의 이야기는 다소 투박해보일 수 있다. 이것조차 20세기의 낭만을 담고 있다.
여기에 톰 크루즈가 갖는 낭만도 더해졌다. 사실 톰 크루즈는 그저 액션만 하는 배우가 아니다. 그는 1989년 '레인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을 더 빛나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 다음해 '7월4일생'으로는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그 해 남우주연상은 '나의 왼발'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차지했다. ...애초에 범접불가한 상대다). 여기에 '제리 맥과이어', '매그놀리아'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에 연달아 이름을 올렸다(트로피를 받은 적은 없다). 연기 욕심이 누구보다 충만했던 이 배우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로 자신을 아이콘화 하기에 이른다. 가끔씩 톰 크루즈의 연기를 보다 보면 뭉클한 순간이 있다. 대표적으로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에서 석양이 지는 강가를 전력으로 질주하는 장면이다. 사실은 대단히 긴박한 장면이지만, 이 장면에서는 '자기 일에 헌신한 한 남자의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기분은 '탑건: 매버릭'에서 고스란히 재연됐다. 현대 사회에서 열정을 강요하는 게 때로는 가혹해보일 수 있다. 그래서 톰 크루즈를 본받으며 살 필요는 없다. 다만 열정적으로 자기 일에 헌신하며 산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멋진지 감상하는 일은 대단히 낭만적이다.
'슬램덩크'는 1990년대 초반 만화잡지를 통해 연재된 만화다. 이 시기(1980년대 중반, 90년대 초반)는 마이클 조던의 농구인생이 전성기를 누렸을 때이며 그를 중심으로 NBA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연고(고연)전이 전성기를 맞았으며 이 같은 인기를 바탕으로 1997년에 프로농구가 처음 출범했다. 당시 '슬램덩크'는 남자 중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슬램덩크'가 누렸던 이 인기는 단순히 '농구붐에 편승한 인기'가 아니다. 지금 생각해도 '슬램덩크'가 가진 가장 황당한 매력은, 40분의 농구경기를 만화책 5~6권 분량으로 늘려버린 데 있다(실제 산왕공고와의 경기는 이 정도 분량이 나왔다). '슬램덩크'의 이야기 전개 방식은 농구경기 중간에 인물의 회상씬을 중심으로 한 작은 이야기를 집어넣으면서 농구경기에 서사를 부여한다. 이야기가 아닌 경기에서 캐릭터성이 살아나면서 농구경기는 하나의 드라마가 돼버린다. 그 드라마는 고난을 극복하고 경기에 최선을 다하는 사내의 이야기다. 혈기왕성한 10대 남학생들의 열정을 깨우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이야기다(여기에 서태웅과 강백호의 '앙숙케미'도 한몫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기발하게도 만화책의 산왕공고전을 재연한다. 대신 영화에서는 주인공을 송태섭으로 바꿔버린다. 만화책을 떠올려보면 송태섭은 다른 주인공들에 비해 서사가 적은 편이다. 이 작품을 연출한 다케히코 이노우에는 마치 만화책에서 못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처럼, 송태섭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온다. 이것은 '슬램덩크' 자체에 새로운 확장성을 가져온다. 북산과 산왕의 경기가 열리는 그 농구코트 안에서는 형의 그늘에 가려진 현필, 북산에 들어오길 잘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닦는 호식, 태섭이 1학년 때 함께 다녔던 병욱까지. 누구라도 이야기가 존재하고 모두가 경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런 시도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제시한 것뿐 아니라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뿌듯한 낭만을 보여준다. 어쩌면 '슬램덩크'를 보고 있는 독자들조차 이야기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새로운 방식으로 낭만을 제시하면서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을 놓치지 않는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만화책과 달리 많은 대사가 생략돼있다. 예를 들어 산왕의 감독인 도진우가 신현철에게 "현철아, 백호에게 붙어라"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이 장면을 대사없이 수신호로 처리한다. 또 결정적 대사인 강백호의 "왼손은 거들 뿐"은 말하지 않고 눈빛으로 대체한다(다만 번역의 차이겠지만, 서태웅이 정대만에게 패스하고 산왕의 선수가 "그 녀석은 쏘지 못해"라고 말할 때 서태웅은 "과연 그럴까?"라고 말한다. 만화책에서 이 대사는 "그 정도 멍청이는 아니지"다. 이건 개인적으로 좀 아쉽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많은 대사를 생략하지만, 그 시절 남학생들을 설레게한 명대사들은 90% 이상 그대로 나온다. 영화에서는 조연으로 밀려난 강백호도 "안 선생님에게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전..지금입니다"라고 말하거나 정대만이 "이젠 내겐 림밖에 보이지 않아"라고 말하는 대사는 그대로 다 나온다. 대사 외에도 만화책 내내 앙숙이었던 서태웅과 강백호의 하이파이브도 그대로 나온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그 자체로 대놓고 '낭만'을 의도하고 있다.
나는 늘 '사랑은 아날로그 시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조금의 불편함을 안고 살던 아날로그 시대에서는 불편함이 정성이 되고 애틋함이 된다. 디지털이 주는 편리함은 정성과 애틋함이 주는 낭만을 반감시킨다. 고도화된 디지털 시대에서는 오히려 낭만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손편지의 정성에 이전보다 더 크게 감동받고 LP판의 지글대는 음질도 낭만적으로 들린다. 낭만과 디지털은 타협하기 어려운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낭만과 디지털도 타협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날로그의 태도로 접근한 디지털 기술의 산물인 '아바타: 물의 길'은 디지털 시대에도 정성을 쏟으면 낭만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앞으로 우리는 좀 더 낭만적으로 살 수 있게 될까? 아니면 낭만을 그리워하다 경쟁에 도태돼 말라죽어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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