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개봉한 한국영화들을 살펴보면 "돈 벌었다"라고 말할만한 작품이 눈에 띄지 않는다. 1월 개봉작 중 대작이었던 '유령'과 '교섭'은 모두 손익분기점을 넘기는데 실패했다. '카운트'도 개봉 후 2주 동안 36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비교적 저조한 수준이다. 3월 1일 개봉한 '대외비'는 55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선방하고 있지만, 출연 배우의 면면을 살펴보면 폭발적인 흥행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같은 날 개봉한 '멍뭉이'는 좋은 배우들이 출연하고 강아지까지 등장하지만, 11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정리하자면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중 100만 관객을 넘긴 영화는 '교섭'뿐이다(172만명). 그러나 이마저도 손익분기점인 300만명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3월 15일 개봉하는 '소울메이트'나 22일 개봉하는 '웅남이'는 비교적 큰 자본이 투입되지 않은 만큼 흥행부담은 적다. 그럼에도 100만 관객을 넘긴 영화가 단 1편뿐이라는 사실은 한국영화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에 대해 대중들이 지적하는 원인은 "영화가 재미없어졌다"와 "극장 티켓값이 비싸다"는 점이다. 실제로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들 중 관객에게 제대로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다거나 이야기가 설득력을 갖춘 작품을 찾기는 어렵다. '유령'의 경우 액션 시퀀스의 카타르시스에 주력하고 있지만, 카타르시스가 힘을 받기 위한 갈등을 쌓아올리지 못한다. '교섭'은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을 지우기 위해 나름 공을 들였지만, 워낙 유명한 사건인 만큼 이를 지우기는 어렵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실제 사건을 인식하고 영화를 보는 순간, 이 영화의 '발암캐릭터'는 주인공이 된다. 보는 자체가 고역이 될 수 있는 작품이다. 팬데믹 이후 처음 1000만 관객을 동원한 '범죄도시2'가 착실한 빌드업과 액션 시퀀스의 카타르시스로 관객에게 만족을 줬다는 점은 관객의 요구를 여실히 보여준다. '유령'과 '교섭'은 모두 '창고영화'로 분류된 작품이다. 팬데믹 이전이나 초기에 촬영을 마쳤지만, 개봉시기를 확정하지 못해 미뤄진 작품들이다. 이는 배급사에서도 확신이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배급사도 장담할 수 없는 영화였다면 "영화가 재미없다"는 사실은 현재 한국영화의 악재로 보기 어렵다. 지금이라도 관객의 요구를 파악해 영화를 기획한다면 역량있는 작가와 스탭들은 좋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다.
다만 "극장 티켓값이 비싸다"는 점은 분명 악재다. 극장은 팬데믹 이후 3번 티켓값을 인상했다. 관객수가 급감하면서 경영상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이유였다. 코로나 팬데믹은 제조업과 관광업, 문화사업 전반에 큰 타격을 줬다. 극장이 타격을 입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극장이 가장 큰 피해자였는가"라도 묻는다면 확답하기 어렵다. 항공과 숙박업 등 여행업계가 입은 타격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충격이 적었다. 사실상 망하기 직전까지 구석에 몰린 여행업계는 개점휴업을 선언하거나 다른 돌파구를 찾아 사업을 연명하기도 했다. 이들은 극단적인 몸집줄이기와 신규 서비스 개발로 '버티기'에 돌입했다. 그들이 버티는 동안 비행기값을 올린다거나 기타 비용을 인상해 소비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극장도 나름 혁신은 했다. 팝콘 배달 서비스를 시작하거나 매점 공간을 활용한 다양한 식품을 판매했다. 극장은 더 이상 영화를 상영하지 않았고 스포츠 경기나 콘서트를 중계했다. 선택적 휴업까지 돌입하면서 그들도 나름대로 '버티기'를 시도했다.
그럼에도 극장은 임대료나 임금 등 상당한 고정비용을 요구한다. 결국 극장은 티켓값을 올려 돌파구를 찾기에 돌입했다. 나 역시 처음 1~2번은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엔데믹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할 즈음에 한 번 더 올린 것은 선 넘었다는 생각이다. 심리적 한계선을 넘어버린 티켓값에 관객들은 극장 방문을 신중히 하게 됐다. 특히 엔데믹 기간에 급성장한 OTT 서비스가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만큼 극장의 필요성은 더욱 옅어졌다. 극장은 OTT가 따라올 수 없는 절대적인 강점을 가지고 있다. 영화관람 경험이 극대화되는 장소라는 점이다. 극장은 대형 스크린과 탄탄한 사운드 시스템으로 관객에게 최적의 영화경험을 선사한다. OTT의 성장에도 극장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관객들이 이를 포기하고 극장 방문을 꺼리게 됐다.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 1부'가 극장에서는 150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지만, 넷플릭스에서는 며칠 동안 대한민국 영화 부문 1위에 올랐다. 이는 흥행부진이 영화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극장은 영화경험을 더 극대화하기 위한 선택을 한다. 더 좋은 영사시스템과 사운드 시스템을 탑재하고 더 쾌적한 좌석과 개인화된 관람 공간을 제공한다. 이미 CGV는 용산과 영등포, 연남에서 이 같은 작업이 이뤄졌고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수퍼플렉스도 리모델링을 통해 관람환경의 질을 높였다. 극장의 이런 결정은 오히려 한국영화에 더 큰 악재가 될 수 있다. 일부 극장의 환경 개선과 그에 따른 영화 티켓값 인상은 각 극장 간의 영화경험에 차별을 두게 된다. 예를 들어 CGV용산아이파크몰 아이맥스관과 CGV인제 내린관의 영화경험이 같을 수 없다는 점과 같다. 또 프리미엄관에서 5만원씩 내고 보는 영화와 지방 소도시 극장에서 1만원 조금 넘는 돈을 내고 보는 영화는 같을 수 없다. 이는 영화매니아들만이 갖는 문제가 아니다.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은 더 재미있는 영화경험을 원한다. 실제로 같은 영화라도 관람환경이 좋은 극장에서 보면 더 재미있다. '재미있는 영화'의 기준은 어느 지역에 살며 어떤 극장환경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극장이 티켓값을 올리고 수도권 극장에 대해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이런 영화경험의 차별을 더 키우는 일이다. 이는 전국에 있는 관객들에게 '재미있는 영화'에 대한 기준을 더 엄격하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만든 사람이 최선을 다했고 좋은 결과물로 나온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선택을 받지 못하는 영화는 영화 역사에서 늘 있어왔다. 관람환경의 차별은 이런 '운 없는 영화'들을 더 늘어나게 만들 것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같은 목적을 가진 관객들이 집단적 경험을 공유하는 일이다. 데이미언 셔젤의 '바빌론' 마지막 장면에서는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는 관객들의 다양한 표정이 나온다. 키스를 하거나 팝콘을 먹으며 저마다 표정과 행동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사랑은 비를 타고'가 상영되는 공간에서 같은 경험을 나눴다. 집단적 경험으로 형성되는 유대감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삶에 전하는 위로를 보여준다. OTT의 등장은 어디에서나 영화를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음원 플랫폼의 등장 초기처럼 영화를 인스턴트화했고 집단적 경험을 개인적 경험으로 바꿔버렸다. 시대의 변화와 편리를 추구하려는 욕구가 만든 결과인 만큼 큰 불만은 없다. 그러나 집단적 경험은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하고 3년간의 코로나 팬데믹은 집단적 경험의 소중함을 다시 상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은 티켓값 인상과 관람환경 개선으로 영화관람의 집단적 경험을 저하시켰다. 우리나라에는 역량이 있는 작가와 창작자의 마음을 아는 제작자가 많다. 그래서 한국영화의 부진은 언제든 만회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더 이상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여가문화가 아니게 됐다는 점은 한국영화에게는 재앙과 같다.
티켓값 인상이 유난히 한국영화에게만 재앙과 같은 이유는 외국영화는 여러 나라를 상대로 마케팅을 하는 만큼 한국에서의 부진은 작은 나라에서의 부진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먼저 성공을 거둬야 하는 한국영화에게는 이런 부진이 더 크게 다가온다. 비극적인 사실은 극장은 '한국영화의 부진'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유령'과 '교섭'이 부진할 때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아바타: 물의 길'이 그 자리를 채웠다. 영화만 있다면 극장은 어떻게든 돈을 벌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결국 망하게 되는 건 한국영화 제작사다. 특히 최근 창고영화의 잇따른 부진은 한국영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저하시킬 수 있다. 극장에는 '불운한 한국영화'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티켓값 인상으로 높아진 관객의 기준은 결국 다양한 영화의 생존을 방해한다. 2003년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에도 다양성이 확보되면서 급격한 성장을 이뤘다. 반대로 말하면 다양성의 몰락은 곧 영화의 몰락을 의미한다.
얼마전 최동훈 감독은 '디렉터스 체어: 스페셜 토크'에서 극장 티켓값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극장이 대중적 여가공간으로 자리를 지키겠다는 시그널을 소비자에게 전달해줘야 한다는 게 최동훈 감독의 의견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최근 고정비용이 인상하고 물가 상승률이 가파른 시점에서 어쩌면 극장은 지금도 티켓가격을 더 올리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이제 극장은 고민이 필요하다. 대중적 문화공간의 위치를 더 지킬지, 아니면 영화경험의 양극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출구전략을 찾을지.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극장이 후자를 선택한다면 꽤나 비극적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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