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매개체를 통해 명료해지고 생명력을 얻는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를 했던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장소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날 먹었던 음식이나 거리에서 흘러나왔던 음악, 입었던 옷, 액세서리 등 사소한 몇 개의 매개체가 기억을 더 명료하게 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하나의 매개체는 온전히 한 사람을 대체할 수 있다. 광화문에서 자주 데이트를 했다면 광화문이라는 장소는 사랑하는 연인으로 이어진다. 연인이 국물닭발을 좋아했다면 국물닭발이 곧 그 사람으로 기억된다. 기억력이 대단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기억이 명료해지기 위해서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공간'은 기억의 매개체로써 아주 탁월하다. 공간은 인위적으로 만든 매개체가 아니라 기억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매개체다. 텅빈 카페는 쓸쓸할 수 있지만, 연인과 함께 한 카페는 따뜻하고 행복하다. 밤거리를 홀로 걸으면 외롭지만, 둘이 걸으면 추억이 된다. 학교 교실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실은 그 자체로 기분 좋은 공간이 된다.
셀린 송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24년을 두고 이어지는 첫사랑의 이야기다. 12살의 나영(문승아)과 해성(임승민)은 같은 반 친구면서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이다. 그러나 나영의 부모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로 하고 나영과 해성이 어울려 지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 항상 같은 공간(학교, 하굣길)에 머물면서 함께 지내다 결혼할 것만 같았던 나영과 해성은 다른 공간으로 분리된다. 12년이 지나고 뉴욕에서 초보 극작가로 지내는 나영(그레타 리)은 SNS에서 자신을 찾는 해성(윤태오)을 확인하고 메시지를 보낸다. 그렇게 두 사람은 화상통화로 대화를 하지만, 불안정한 통신망에 대화는 끊어지고 뉴욕과 서울의 거리만 체감하게 된다. 극작가로 성공이 중요했던 나영은 해성과 대화를 잠시 그만두기로 한다. 그렇게 또 12년이 흐른다. 나영은 예술인 레지던스에서 만난 아서와 결혼했고 해성은 중국에서 만난 연인(황승언)과 연애를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해성은 휴가를 맞아 뉴욕으로 떠나기로 하고 뉴욕에서 해성과 나영은 24년만에 재회한다.
'패스트 라이브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간'이다. 나영과 해성이 함께 걷던 하굣길, 교실,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내던 공원에서 두 사람은 한 프레임 안에 잡힌다. 특히 공원 조각상에서는 사각형 공간에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한 프레임 안에 있다.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은 마치 24년의 분리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영화는 해성이 머무르는 서울과 나영이 머무르는 뉴욕으로 무대를 나눈다. 두 사람은 SNS를 통해 재회했고 화상채팅으로 대화를 한다. 이 영화가 좀 더 달달한 로맨스를 기대했다면 화면을 분할해서라도 두 사람을 한 프레임 안에 담았을 것이다. 만약 이 경우에 화면을 분할했다면 이것은 '분리'가 아닌 '만남'이 된다. 그러나 영화는 나영과 해성의 공간적 거리를 체감하게 하려는 듯, 대화하는 와중에도 두 사람을 떼어놓는다. 대화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서울과 뉴욕의 거리감만 더 부각될 뿐이다.
그렇게 대화가 끊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나영은 아서를 만나고 뉴욕에 정착한다. 뉴욕은 이제 나영의 공간이다. 그런데 해성은 여전히 자기 공간을 찾지 못한 듯 하다. 중간에 중국에도 잠시 다녀왔지만, 중국은 자신의 공간이 아니다. 무엇보다 관객은 해성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에서 드러난 해성의 일상은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게 전부다. 서울에서 해성의 공간은 작은 술집 안이 전부다. 결국 해성은 나영을 만나기 위해 나영의 공간으로 향한다. 뉴욕으로 간 해성은 나영을 만났다. 그 순간 두 사람은 24년전 아이들로 돌아간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서로의 모습은(온기가 담긴 모습은) 24년전 어린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의 설렘이나 반가움은 찰나의 감정이었다. 이미 그때 그 아이들은 24년전 그 공간에 두고 왔기 때문이다. 한국말이 다소 서툴어진 나영은 그때 그 아이가 아니고 해성 역시 현실을 너무 알아버린 어른이 돼있었다. 무엇보다 뉴욕에는 그때 그 교실도, 하굣길도 없다.
그래서 이 만남은 두 사람이 온전히 분리되는 과정이다. 24년전 나영은 해성과 함께 하던 공간에 어린 자신을 두고 떠났다. 그 사이 해성이 없는 공간에서 나영은 성장했지만, 나영의 기억이 남은 공간에서 해성은 조금 늦게 성장했다. 해성의 공간은 나영의 그것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해성이 뉴욕에 가서 나영을 만난 것은 나영의 공간에 어린 자신을 놓아두기 위해서였다. 추억이 없는 공간에는 그리움이 커진다. 해성은 어린 나영을 담아둘 수 있었지만, 뉴욕에 사는 나영은 어린 해성을 담아둘 수 없다. 그 만남은 나영이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마지막 퍼즐인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영이 쏟아내는 감정은 24년전 해성의 그것과 같다. 이제서야 두 사람은 이번 생에서의 인연을 마무리지었다.
'인연'은 대단히 물리적이다.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는 '인연'을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바늘 하나를 딱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씨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씨 하나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이 바늘 위에 딱 꽂힐 확률. 그 계산도 안 되는 확률로 너희가 지금 이곳에서 만난 거다"라고 표현했다. 인연은 결국 '만나야' 성립이 되는 물리적 작용이다. 나영과 해성이 그 교실에서 함께 만난 것은 인연이다. 그러나 나영의 가족이 이민을 떠나면서 공간이 분리됐다면 인연은 끊어진 셈이다. 해성이 뉴욕으로 향한 것은 끊어진 인연을 붙잡으려는 시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인연을 마무리짓기 위한 선택이었다. 인연은 운명적인 것이다. 이는 사람의 의지로 결정할 수 없음을 말한다. 인연을 맺는 순간은 사람의 의지로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의 마무리는 사람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인연의 다음 장을 스스로 써내려가려는 인간의 의지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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