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이 정해진 시간 동안 주인공은 '기-승-전-결'을 경험한다. 여기서 '결'에 이르면 영화의 시간, 이야기 주인공의 시간은 끝이 난다. 그런데 어떤 영화는 이야기가 끝이 나더라도 주인공의 삶이 어디선가 계속 될 거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나는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영화 '보이후드'는 이런 실험의 끝에 선 영화다. 같은 인물들의 성장을 담기 위해 12년동안 촬영한 이 영화는 영화적 시간과 삶이 가까워지도록 하는 일종의 실험이었다. 이 실험을 겪고 나면 영화가 끝나도 인물들이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런 기대는 삶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든다.
'보이후드'에 비하면 '대결! 애니메이션'은 시작과 끝이 상당히 명확한 영화다. 이 영화는 메인 시간대 애니메이션 연출을 맡아 데뷔전을 치르는 주인공 히토미(요시오카 리호)가 동시간대 작품에 들어간 천재감독 치하루(나카무라 토모야)와 시청률 경쟁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츠지무라 미즈키가 쓴 소설 '패권 애니!'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나는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먼저 봤다. 담백하면서도 간결한 내용이 인상깊었고 재미있었던 영화라 정식 개봉하면 한 번 더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식 개봉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어릴 때부터 즐겨본 일본만화는 '별의 별 것을 가지고 대결한다'는 인상을 줬다. '요리 경연대회'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있는 일이지만, 그걸로 저렇게 치열하게 대결하는 게 가능한가 생각하기도 했다. 바둑을 하는데 유령까지 나와야 할 일인지, 테니스를 치는데 온갖 무협액션까지 해야 할 일인지, 일본만화의 소소한 강점 중 하나는 싸우지 않아도 될 걸로 싸우게 만들고 싸워야 할 일이라면 풍성한 서사를 가지고 싸우게 만든다. 그렇게 '잘 싸우는 만화'는 오랫동안 사랑을 받고 재미가 있다. 그런 맥락에서 '대결!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 제작을 두고 성장하고 싸우는 이야기다.
명목상 이 이야기는 연출자인 히토미와 치하루의 대결이다. 그런데 영화는 두 사람만의 대결로 몰고 가지 않는다. 연출자를 도와주는 프로듀서가 등장하고 CG와 삽화, 배경, 녹음, 사운드, 편집 등의 스탭들도 나온다. 여기서 연출자의 역할은 리더십에 있다. 영화나 만화 모두 마찬가지지만, 연출자는 작품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작품을 성공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 스탭들을 설득하고 달래면서 원하는 바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실력을 증명해 인정받는 것도 연출자의 일이다. 이건 확실히 영화나 애니메이션이나 큰 차이가 없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사실상 '히토미의 성장기'다. 영화 초반부 기술시사를 하러 가는 길에 맨 뒤에서 따라오던 히토미는 성장을 하게 되면서 맨 앞에 서서 장군처럼 군사들을 이끌고 간다. 히토미가 성장하는 모습은 이 영화가 주는 큰 즐거움 중 하나다. 스탭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갈등하던 히토미는 여러 일을 겪으며 스탭들과 어울리고 설득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그 가운데 실력을 증명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그곳으로 이끌고 간다.
그에 반해 치하루의 리더십은 실력으로 사람들이 따르도록 하는데 있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치하루는 히토미의 페이스메이커다. 첫 작품을 성공으로 이끈 천재 디렉터인 만큼 세간의 부담을 떠안고 새로운 작품에 임하게 된다. 영화는 치하루를 히토미만큼 섬세하게 다루진 않지만, 차기작을 준비하는 천재 감독의 고뇌와 불안을 나름 잘 표현하고 있다. 치하루에 대한 서사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이 영화는 마치 류승완 감독의 2005년작 '주먹이 운다'처럼 어느 쪽이 이겨도 상관없는 대결이 된다.
이 가운데 '대결! 애니메이션'에는 흥미로운 선택이 등장한다. 극 중 동시에 시작한 두 애니메이션의 마지막회를 앞두고 감독들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가장 완벽한 마지막회를 만드는 것은 작품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일이자 자신의 커리어를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치하루는 영화 내내 "인물들을 다 죽이고 싶다"고 말한다. 히토미는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살아남고 싶은 만큼 대중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엔딩을 만들어야 한다. 눈 앞에 주어진 뻔한 길이 있지만, 마지막회에 이르러 두 감독들은 다른 선택을 한다. 치하루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대중과 타협하고 히토미는 대중들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는다. 기성작가는 한발짝 더 대중에게 다가갔고 신인작가는 자신의 소신을 보여줬다. 고민과 성장이 보여준 가장 이상적인 결과다. 언젠가 히토미는 치하루의 위치에 이르러 대중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때 히토미의 선택은 얄팍한 타협이 아니라 대중과 가까워지려는 시도가 된다. 이미 히토미는 자신의 소신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 대결의 결과는 곱씹을수록 매력적이다.
'어느 쪽이 이겨도 상관없는 대결'은 '어느 쪽이 져도 상관없는 대결'과 같다. 승자에게는 당연히 승리의 영광이 돌아가지만, 패자는 모든 것을 잃진 않는다. 승패와 상관없이 삶은 계속되고 내일의 새로운 숙제가 찾아온다. '대결! 애니메이션'은 두 감독의 승패 결과와 쿠키영상에서 그들의 삶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패자에게도 삶이 계속되고 인생에 다음 라운드가 있다는 것은 참 감동적인 일이다. 경쟁에 모든 것을 걸게 하고 경쟁에서 패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우리나라의 교육 행태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메시지다. 우리 교육 시스템은 3년의 교육을 단 하루의 시험으로 평가 받게 한다. 분명 그 시험이 끝나도 내일이 찾아오고 새로운 과제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주변의 시선과 시스템은 그 하루의 시험에 인생을 걸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사실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대결은 어느 쪽이 이겨도 상관없는 대결이다. 기어이 내일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해야 할 일이라면 후회없이 소신있게 싸우는 것뿐이다. '대결! 애니메이션'은 당연하지만, 잊고 지냈던 것들을 깨닫게 해준다. 어쩌면 '주먹이 운다'를 보고 이미 깨달았어야 할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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