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사고로 외딴 곳에 조난당한 인물의 이야기는 꽤 전통이 깊다. 조난당한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는 진한 감동을 준다. 불의의 사고를 이겨내고 삶을 지켜내는 사람들의 드라마는 관객들에게 닥쳐온 각자의 현실 고난을 이겨낼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장르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영화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사고를 이겨낸 사람의 이야기가 존재해온 이유도 이 때문이다. 최근에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세상이 좁아지면서 관객들은 더 멀고 외딴 곳에서 조난당한 사람의 생존이야기를 요구한다. 오죽하면 급기야 지구 넘어 달이나 화성에 조난당한 사람을 구해내는 이야기까지 나오겠는가? 우주 한복판에 조난당한 사람이 스스로 살아남아 지구로 귀환한다던지, 화성에서 감자를 키우며 버텨서 살아남아 지구로 돌아오는 이야기는 우주 시대에 걸맞는 인간승리 생존기다(여담이지만, 나는 화성에서 감자를 키우며 살아남은 사람의 무용담을 좋아한다. 그 이야기에는 진한 감동이 있다).
조난당한 사람의 생존기를 그리기 위해 우주로까지 나가는 상황에서 50년전 안데스 산맥에 조난당한 사람들의 생존기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심지어 이 이야기는 30년전에 이미 영화로 나왔다. 넷플릭스 영화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은 직관적인 제목과 오래된 영화팬들은 이미 알 법한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은 30년전 프랭크 마샬의 영화 '얼라이브'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지점이다.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은 실제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해 경의와 존경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가 아니다. 이 이야기에는 감동 실화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은 등장인물 중 누군가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사고를 설명하고 그때의 심경을 전하는 나레이션으로 봤을 때 화자는 이 사고의 생존자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나레이션을 하는 화자의 이름은 누마 투르카티(엔조 보그린치치)다. 그는 이 사고의 생존자가 아닌 사망자다. 관객들은 처음부터 죽은 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관찰하고 쫓아간다. 나레이션이 있는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연출이다. 이 시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30년전 영화 '얼라이브'를 꺼낼 필요가 있다. '얼라이브'에서는 난도 파라도(에단 호크)와 안토니오 발비(빈센트 스파노), 로베르토 카네사(조쉬 해밀턴)가 주인공이다(할리우드 거대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인 만큼 각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얼라이브'에서는 누마와 같은 존재가 등장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감동실화를 다뤄야 했던 만큼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누마는 이 사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이미 알려진 사건이지만, 생존자들은 모두 인육을 먹어가며 두달이 넘는 시간을 버틴다. 설산 깊은 곳에는 눈과 바위 말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누마는 끝까지 인육을 먹기를 거부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사망 직전 누마의 몸무게는 25kg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눈사태로 매몰된 비행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유리를 깨다가 발목에 부상을 입었다. 심각하지 않은 부상일 수 있지만, 영양 상태가 심각하게 결핍되면서 염증이 확대돼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이 영화는 누마뿐 아니라 사망한 29명에게 상당한 정성을 기울인다. 사망자들은 일일이 이름과 나이를 자막으로 열거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헬기가 도착하고 생존자들이 설산을 떠날 때도 카메라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환희에 찬 표정을 비추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그들이 떠나간 비행기 잔해의 흔적들을 비춘다. 그곳은 그들이 두 달 넘게 버틴 곳이며, 죽은 사람들이 잠들어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생존자들이 귀환했을 때 우루과이 시민들은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과거 삼풍백화점 참사 당시 수십일만에 생환한 생존자들에게 국민들이 박수를 보낸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러다 이후 그들이 인육을 먹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됐다. 당시 몬테비데오 대주교가 이 사안에 대해 문제삼지 않기로 하면서 비난은 사그러들었지만, 생존자들은 기어이 동료의 몸을 먹고 버텼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우루과이는 가톨릭 신자의 비중이 높은 나라다). 영화는 그들이 느꼈을 죄책감을 비추는데 정성을 쏟는다. 누마의 존재가 등장하고 그의 나레이션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인육을 먹기를 거부하다가 영양결핍으로 사망한 누마의 존재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일말의 죄책감이다. 어쩌면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온전한 박수와 환호를 받는 대신 죄책감을 안고 사는 게 마음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종교적 가치관이 확고한 사람이 인육을 먹어야 하는 것은 굉장한 고뇌와 고통을 요구하는 일이다.
이 영화는 누마와 생존자들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논하지 않는다. 관객들에게 대놓고 선택을 던지지도 않는다. 다만 어떤 선택을 해도 그것이 옳은 선택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인육을 먹기를 거부한 누마는 고통과 죽음이라는 댓가를 받아들었다. 인육을 먹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죄책감과 비난이라는 댓가를 받았다. 의식의 흐름이 이 지점에 이르고서야 나는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La sociedad de la nieve'. 번역하면 '눈의 사회'다. 마치 '파리대왕'처럼 설산 속에서 이들은 하나의 사회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사회 구성원은 저마다 선택을 할 수 있다. 인육을 먹지 않는 자에게 인육을 먹는다고 강요할 수도 없고 인육을 먹지 않는 자가 인육을 먹는 자를 야만인이라고 비난할 수도 없다. 선택에 따라 책임을 지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온전한 영광을 누리지 않는다. 그저 선택하고 댓가를 치를 뿐이다.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은 극한 상황 속 식인행위의 화두를 던진다. 이는 대단히 특수한 상황이지만, 극한 상황 속에서 윤리·도덕적 신념을 져버리는 것이 어디까지 용서받고 허용될 수 있는지 묻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종교적 화두도 등장한다. 영화의 극 초반부에 성당에서 친구들이 만나는 장면이 있다. 성경을 그대로 읽는 장면이 아니라서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광야에 내몰린 예수가 40일간 금식을 하던 중 사탄의 시험을 받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 유명한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빵으로 바꿔보라"는 시험이다. 이 장면은 부득이하게 이후 일어날 일의 복선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40일간 금식한 예수의 이야기는 누마와 오버랩된다.
누마와 예수가 겹쳐보인다면 영화는 누마가 기적을 행하고 메시아가 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안데스 설원에는 시험에 들게 하는 마귀도 없고 예언자도 없다. 인육을 먹는 사람들이 '마귀'라고 보일 수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영화는 그들을 '불가피한 선택을 한 생존자들'로 정의내린다(몬테비데오 대주교도 그랬다). 누마는 예수도 아니고 메시아도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누마의 죽음 직후 그의 손에서 나온 쪽지는 정말 그가 메시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누마가 친구들에게 전달한 쪽지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라는 말이 씌여있다. 파라도와 카네사가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열흘 간 산을 넘어 떠나기로 마음 먹게 한 계기가 되는 말이다.
누마는 성경에 등장한 메시아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는 무모한 선택을 한 인간도 아니다. 설원에서 누마의 행적은 마태복음 4:1-4:25에 등장한 예수의 모습을 재해석한다. 누마는 '성경에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라고 쓰여 있다'라는 무모한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친구들을 지켜본다. 만약 인육을 먹기로 한 사람들이 마귀라면,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마귀의 선택을 존중한 것이다. 이것이 시민사회 속 예수가 해야 할 행동이다. 제임스 카메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잃어버린 예수의 무덤을 찾아서'에서는 성경에 대한 견해가 등장한다. 오늘날 전세계에 알려진 성경은 서기 836년 프랑스 왕정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라틴어로 된 성경이며 로마 가톨릭에서 쓰고 있는 라틴어 성경이 정통성을 계승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예수는 성경에 쓰여진 것과 다른 행적을 보인 적이 꽤 있었을 것이다.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 속 누마의 행적은 성경을 재해석해서 시민사회 속 예수를 다루고 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라틴어 성경에 나올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연출한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는 과거 실화 기반의 재난영화 '더 임파서블'을 만들었다. 2004년 태국에서 일어난 초대형 쓰나미 사고를 바탕으로 한 가족의 생존담을 다룬 실화기반 영화다. 할리우드에서 그는 '몬스터 콜'과 '쥬라기 공원: 폴른 킹덤'을 만들었으며 드라마 '페니 드레드풀'과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의 파일럿 에피소드도 연출했다.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은 '더 임파서블' 이후 11년만에 만든 실화 기반 재난영화다. 종교·윤리적으로 대단히 풍부한 담론을 담고 있는 좋은 영화다. 그리고 앞서 이 영화를 두고 '온전한 감동실화는 아니다'라고 했지만, 인물이 구조되는 순간에는 뭉클한 감동이 밀려온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이야기는 언제 봐도 감동적이다. 재미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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