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말에 일본여행을 다녀온 나에게 "왜 7개월만에 또 떠났는가?"라고 묻는다면 몇 가지 그럴싸한 이유로 답을 할 것이다. ①4월말에 갔던 홋카이도가 꽤 재밌었고 ②지난 몇 년간 여자친구와 제대로 여행을 다니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이 아직 덜 해소됐으며 ③일본이라는 나라에 궁금한 게 조금 더 생겼다. 이 이유들은 어쩌면 핑계일 수 있다. 나는 대외적으로, 그리고 여친에게 '7개월만에 또 일본으로 가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엔화가 남아서". 실제로 나는 홋카이도에 갔을 때 10만엔의 엔화를 바꿨고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4만8000엔 정도 남아있었다. 그 때 이후 엔화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고, 특히 비상계엄 선포 직후에는 미친 듯이 올라버려서 "바꿀까?"라는 미련도 있었지만, 기왕 예약 다 한 거 그냥 떠나기로 했다. 사실 여행을 한 번 더 가보고 싶긴 했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왜 도쿄인가? 나는 일본의 대도시에 대해 궁금한 게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홋카이도 이후 다음 일본여행지를 정한다면 당연히 오키나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겨울에 따뜻한 오키나와로 떠나는 것은 대단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인 것 같았다. 그러나 오키나와를 포기한 이유는 딱 하나다. '나는 장농면허다'. 핑계를 대보자면, ①서울생활을 하면서 자가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②'한문철TV', '맨인블박'과 같은 유튜브 채널을 자주 시청했다. 게다가 ③나는 쫄보이면서 ④성질이 더럽다. ⑤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주차문제를 거론하며 자차 구매를 만류했다. 고로 나는 도로 위의 질서유지와 시민의 안녕을 위해 그동안 운전을 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운전이 가능했어도 운전석의 위치와 도로 진행방향이 다른 일본에서 운전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오키나와를 제대로 즐길 수 없을 것 같아 부득이하게 포기했다. 오키나와를 제외하고 몇 개의 소도시들이 여행 후보지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나는 일본에 대해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 함께 떠난 여친이야 일본의 여러 장소를 다녀봤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도쿄가 (그나마) 익숙한 여친은 이번 여행에 대해 전적으로 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일본을 경험하는 차원에서 도쿄로 향하기로 했다.
도쿄로 향하기로 마음먹고 여행계획을 짜면서 나는 어떤 컨셉으로 여행을 가야 할 지 고민했다. 홋카이도에서 좋았던 기억들을 떠올려봤다. 노보리베쯔의 지옥계곡은 그저 신기했다. 하코다테는 오래되고 독특한 건물들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삿포로 스스키노는 일본의 번화가에 대해 경험해볼 수 있었다. 오타루는 하코다테와는 다른 분위기로 독특한 건축물이 많았다. 마코마나이는 광활한 평원과 4월말의 설산, 안도 타다오가 디자인한 두대불의 위용이 매력적이었다. 이런 기억들을 종합한 결과, 나는 이번 도쿄여행의 테마를 '건축물 기행'으로 정했다. 테마를 정하고 유튜브나 블로그에서 먼저 여행을 다녀온 분들의 후기를 살펴봤다. 갈 곳을 어느 정도 정리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건축물로 테마를 정하니 갈 곳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뺄 곳은 빼가면서 여행코스를 결정했다.
출발 당일, 우리는 지난번과 다르게 서울역 도심공항에서 체크인과 출국 절차를 마쳤다. 한산한 서울역에서 절차를 마치고 공항까지 곧장 가는 직통열차를 탔다. 지난번과 다르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면세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너무 빨리 도착한 덕에 우리는 면세구역 안에 스타벅스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며 비행기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비행기(티웨이)가 지연된 덕에 지나칠 정도로 여유롭게 여행을 떠났다. 혼잡했던 나리타공항에 내려서 '더 혼잡한' 신주쿠에 도착했다. 입국 절차에 다소 시간을 소요한 덕에 신주쿠에는 꽤 늦게 도착했다. 신주쿠역 지하도의 악명은 예전부터 많이 들었다. 부평지하상가는 친절한 수준이라는 미로같은 곳이라고 한다. 솔직히 조금 코웃음을 치긴 했다. 나는 "지하도에 길을 못 찾을 거 같으면 아무 통로나 타고 지상으로 나가면 된다"는 생각을 늘 했기 때문이다. 막상 신주쿠역에 내리니 불친절한 표지판들이 나를 괴롭혔다. 구글지도와 실제 표지판의 부조화는 여행객들을 괴롭히기에 정말 좋았다. 그 어려운 와중에서도 다행히 지하도를 탈출해 지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여친이 준비했다(항공편은 내가 준비했다). 꽤 전통있고 고급스러운 호텔이었다. 문제는 이 프론트들이 이상한 방을 배정해줘서 뷰(view)고 뭐고 다 별로였다는 점이다. 평소 성격이었다면 뭔 꼬투리를 잡아서 항의했겠지만, 그냥 머무르기로 했다(여친은 서비스직 종사자에게 대단히 친절하다). 여행기간 내내 느꼈지만, 피곤에 지쳐 잠든 덕에 창문 밖 소음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이런 식의 여행이라면 창문 밖에 벽이 있어도 신경 안 쓰지 않았을까 싶다.
첫 번째 여행지는 나카노였다. 앞서 나는 분명 '건축물 기행'이 여행의 컨셉이라고 했지만, 나카노는 그것과 거리가 멀다. 사실 나카노는 건축물과 별개로 그냥 '10덕력'을 분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고른 여행지다. 나는 오래된 애니를 좋아한다. '아키라'와 '공각기동대', '마크로스 플러스', '왕립우주군'처럼 사이버펑크나 스팀펑크 장르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버블경제 말기에 등장한 작화가 미쳐버린 애니'를 좋아한다(그 외에도 사토시 곤의 모든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 시기의 애니와 관련된 굿즈나 서적을 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기왕 일러스트 화보를 살거면 그림 작살난 작품을 사고 싶다). 아무리 양보해도 애니메이션 관련 굿즈나 서적은 2000년대 초반 작품에 머물러있다. 나카노에 가면 20세기 애니메이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전에 밥부터 먹기로 했다. 이번이 두 번쨰 해외여행이지만, 나는 먹는 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런 내가 이번 여행에서 '먹으러 가자'고 정한 두 집 중 한 곳이 나카노에 있다. '우나기 미하루'라는 장어집이다. 골목에 있는 작은 장어집이고 꼬치구이 장어를 판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일단 가게에 앉은 나는 꼬치구이 장어를 시키지 않고 장어덮밥을 시켰다.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꼬치구이 장어를 시키지 않아 여친에게 혼이 났다. 그날 첫 끼니기는 했지만, 과식은 하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건데... 이건 내가 큰 잘못을 한 게 맞다. 뭔가 주문이 밀린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장어덮밥은 무려 1시간 가까이 기다려서 나왔다. 확실히 뭔가 잘못된 건지, 장인정신을 발휘한 건지 몰라도 가게 사장님은 우리에게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그런 사정으로 보아 '혐한'은 아닌 듯 하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TV 뉴스에서는 한국에 관한 소식이 나왔다. 당연히 비상계엄과 탄핵소추안에 관한 이야기다. 오후 6시에 뉴스 프로그램이 시작하고 첫 꼭지가 한국 소식인 셈이다. 해외에 나가서 한국이 시끄러운 소식을 보니 좀 망신스럽긴 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온 소식은 갑자기 사망한 나카야마 미호의 소식이다. '러브레터'로 잘 알려진 그녀가 노래도 불렀다는 사실은 나름 신선했다. 심지어 그 노래는 WANDS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이며 이 노래는 한국 밴드 더 넛츠가 리메이크한 '사랑의 바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뉴스는 한국 국회의 소식보다 나카야마 미호의 소식을 더 오래보여줬다. ...일본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이 걸려 '드디어' 장어덮밥을 먹었다. 홋카이도에서도 느꼈지만, 일본의 식사에는 '푸짐함'을 찾기 어렵다. 장어덮밥도 다 먹으면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영양분을 공급했다'라는 느낌이 들 수 있는 양이었다. "이게 4000엔인가?"라고 생각하면서 장어 한점을 입에 넣었는데, 이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부드러움과 감칠맛이 느껴졌다. 장어구이가 익숙하지만, 그래도 장어탕까지 먹어본 나에게는 전에 느껴본 적 없는 식감과 맛이었다. 정확히는 장어구이와 장어탕 사이의 식감이었다. "뭘 어떻게 조리해야 이렇게 되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은 가운데 나는 순식간에 장어를 다 먹었다. 이후에도 이야기하겠지만, 이날 먹은 장어덮밥은 이번 여행에서 먹은 음식들 중 1등이다. 정말 꼬치구이 장어를 시키지 않은 게 후회됐지만, 더 먹으면 이후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 일어났다.
본격적인 나카노 구경을 위해 '나카노 브로드웨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아키하바라를 가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아키하바라보다는 나카노에 가보고 싶었다. 뭔가 아키하바라는 눈 큰 미소녀가 등장하는 애니들이 득실댈 거 같은데 나카노는 그보다 음침해보였다. 뭔가 좀 더 범위가 넓은 애니들의 흔적이 있을 것 같아 아키하바라를 포기하고 나카노로 향했다. 오래된 상가건물 같은 나카노 브로드웨이는 확실히 좀 더 음침했다. 완구와 씰. 책, 코스튬, 카드 등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관련된 다양한 굿즈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현재의 작품에 국한되지 않고 90년대 작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 정도면 '아키라', '공각기동대'의 흔적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곳을 더 돌아다니면 다닐수록 진입장벽이 높아졌다. 본 적도 없는 80년대 애니메이션부터 성인용품, 성인화보 등등... 더 깊은 심연으로 빠지니 감당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굿즈나 화보에 큰 돈을 쓰기에 나는 너무 합리적인 인간이 돼있었다. 꽤 갖고 싶었던 굿즈라면 1만7000엔짜리 '카우보이비밥' 화보서적이나 큼지막한 '매드맥스2' 포스터 정도가 있겠지만, 하나는 너무 비쌌고 하나는 한국으로 무사히 가져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카노 브로드웨이에서의 여행은 그저 '눈요기'를 하는데 그쳐야 했다. 이미 나는 과거의 덕력을 회복하기에는 너무 일반인이 돼있었다.
나카노에서 돌아와 신주쿠에서 간단한 쇼핑을 마치고 도쿄 도청사로 향했다. 처음에 나는 "가능하다면 도쿄의 전망대는 다 가보자"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도쿄의 전망대는 도쿄 도청사와 도쿄타워, 도쿄 스카이트리였다. 이번 여행의 일정에서 조금씩 시간을 빼면 모든 전망대는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쿄 도청사 전망대를 둘러보고 나니 다른 전망대에 대해 "굳이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타워나 스카이트리는 올라가서 보는 매력도 있겠지만, 밖에서 보는 매력도 있다. 이후에 언급하겠지만, 도쿄타워나 스카이트리는 '올라갈 체력과 시간이 남아있지 않아서' 밖에서 보고 돌아왔다.
도쿄 도청사는 전망대 중에서는 가장 재미가 없는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전망대 층에는 아담한 굿즈샵과 카페가 있었다. 그리고 전망대에서 보이는 건물을 소개하는 안내가 있었지만, 조명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조명이 어두운 건 전망을 더 잘보이게 하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다. 그런데 조금 더 콘텐츠가 될만한 게 있다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삿포로 TV타워에는 그 좁은 공간에 스티커 사진기도 있었다. 도쿄 도청사는 전망대에 올라가서 보는 것보다 광장에 앉아서 보는 조명쇼가 더 매력적이었다. 역시 전망대의 콘텐츠는 안보다 밖에 있는 모양이다.
도청사를 둘러보고 출출해서 야식 먹을 곳을 찾다가 다시 신주쿠로 넘어왔다. 밤 늦게까지 하는 라멘집에 갈 생각이었지만, 일단 자리가 있는 우동집으로 향했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우동집이었지만, 면부터 국물까지 묘한 장인정신이 있는 집이었다. 그덕에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꽤 맛있는 우동을 먹을 수 있었다. 문제는 왜 우동에 미역을 이렇게 올려주는지 모르겠다. 나는 미역을 못 먹는다. 이후에도 언급하겠지만, 이번 도쿄 여행에서 꽤 고역이었던 점은 거의 모든 국물에는 미역이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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