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7

[스포주의] '본즈 앤 올' - 살점을 파고 들어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

영화가 외로움을 표현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무인도에 떨어뜨려 배구공과 친구를 하게 하거나 도심 한 가운데 작은 섬에 고립시킨다. 혹은 AI와 대화하게 하거나 리얼돌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게 한다. 더 예전에 어떤 사람은 집안의 모든 사물들과 대화를 했다(그러면서 그는 갑자기 뚱뚱해진 비누와 얼굴이 변한 인형을 눈치채지 못한다). 어떤 외로움은 너무 먼 세계에 있어서 쉽게 체감이 되지 않는다. 마치 외로움은 작가가 만들어 낸 허상처럼 허공 위를 헤매고 있다. "세상에 누가 배구공을 친구삼아 대화하냐"며 비웃겠지만, 이미 그 영화는 많은 관객들이 공감했다. 정말 너무 외로우면 배구공, 파인애플 통조림과 대화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외로움의 끝은 어디일까? 그 물음의 답이 궁금해질..

콘텐츠/리뷰 2022.11.15

'동감' - 세월이 흘러감을 깨달아 처연하게 사색하네

김하늘, 유지태 주연의 '동감'은 2000년 5월에 개봉했다. 정확히 그걸 극장에서 봤는지 비디오로 봤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대학교 1학년이었던 시기였고 '인생에서 가장 많은 술을 마셨던 해'라고 회상하던 때였으니 아마도 나중에 비디오테이프로 빌려보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HAM이라는 무선통신으로 1979년과 2000년이 연결됐다는 설정은 대단히 신선했다. 영화가 묘사하는 1979년과 2000년은 지금 돌이켜보면 꽤 전형적이었지만, 다른 시대가 연결됐다는 설정은 신선한 시너지를 불러 일으켰다. 그런 '동감'이 2022년에 다시 돌아왔다. '과거'였던 1979년은 1999년이 됐고 2000년이었던 현재는 2022년이 됐다. 이야기는 원작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가 교감했고 그로 인한 여러..

콘텐츠/리뷰 2022.11.14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알게 모르게 내는 여러 세금들에 대해서 "이걸 왜 내나"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우선 '세금'의 정의는 '국가 또는 지방 공공 단체가 필요한 경비로 사용하기 위하여 국민이나 주민으로부터 강제로 거두어들이는 금전'이다. 공공서비스를 구축하고 공무원들을 유지하게 하는 비용으로 세금은 그 역할을 한다. 즉 국민이 세금을 냈다면 정부와 지자체에게 그에 걸맞는 공공서비스를 기대하게 된다. 예를 들어 고장난 가로등을 고쳐주고 구멍난 도로를 메워주고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경계근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설비를 갖추는 일이다. 그리고 당연히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도 기대하게 된다. ...아니, 그걸 제일 기대할 것이다. 이 당연한 이야기는 더 길게 적을 필요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지불한 것에 대..

정치&시사 2022.11.03

청년들에게 '놀 권리'를 보장하라

주말에 신촌에서 가볍게 놀았다. 집에 들어와 자려고 누웠는데 안전 안내 문자가 계속 왔다. '이태원 해밀턴호텔 인근 긴급사고로 현재 교통 통제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불과 하루 전 충북 괴산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살벌하게 울어대던 재난문자에 비하면 차분하게 도착한 문자였다. 그저 교통사고라도 났나보다 생각했다. 그러다 몇 통의 문자가 더 도착한 걸 보고, 뭔가 심상치 않아서 포털사이트 뉴스를 살폈다. 압사사고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심정지 환자가 속출했다는 헤드라인이 뉴스를 도배했다. "어떻게 하면 길 한복판에서 압사사고가 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태원에서 노는 편이 아니라서 그 지역 지리를 잘 몰랐다. 가더라도 해밀턴호텔 길 건너에 주로 있었다. 이태원이 골목이 많..

정치&시사 2022.10.31

[스포주의] '야자수와 전선' - 사악한 행위에 대한 이해

션 베이커의 '레드 로켓'은 꽤 충격적인 영화다. 적어도 '플로리다 프로젝트'라는 풋풋하고 애절한 영화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한물간 포르노 배우와 10대 소녀의 관계를 다룬 이 영화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수준의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나마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영화 '탠저린'을 본 관객이라면 이 감독이 마냥 감성 충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션 베이커의 영화는 감성보다는 밑바닥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려는 의지가 강하다. 로스앤젤리스('탠저린')와 플로리다('플로리다 프로젝트'), 텍사스('레드 로켓') 등 미국의 유명한 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누구도 찾아가보지 않을 것 같은 뒷골목을 배경으로 그곳의 삶을 보여주는 게 션 베이커 영화의 특징이다. 다행스럽게도 '레드 로켓'의 파렴..

콘텐츠/리뷰 2022.10.24

LIFE, 의지대로 사는 삶의 축복

※ 이 글은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람한 '플랜75', '인체해부도', '눈썹',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연대기' 외에 '아워바디'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중심으로 작성했습니다. 언급한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됐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다른 사람과 유기적 관계에서 비롯된다. 사랑하다 다투고, 미워하고 원망하다 후회하고 화합한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유기적으로 변하는 관계 속에서 개인의 온전한 삶은 완성된다. 레니 에이브러햄슨의 '프랭크'나 정윤석의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눈썹'을 보면서 '관계'라는 게 때로는 고통이 될 수 있고, 그 고통의 근원인 언어로부터 해방을 꿈꾼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쓰고 만든 사람 역시 관계가 있었기에 영화라는 공동..

콘텐츠/기획 2022.10.19

[스포주의] '너와 나' - 희뿌연 꿈을 붙잡는 나직한 인사

※ 경고: 이 글에는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영화가 2014년 4월 16일을 기억하는 방법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그날의 진실을 파헤치고, 누군가는 남겨진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아이들의 마지막 순간을 담았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 누군가는 희뿌연 꿈을 꾼다. 조현철 감독의 장편 데뷔작 '너와 나'는 희뿌연 운동장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 영화가, 소위 말하는 '뽀샤시 효과'를 집어넣어 촬영했다는 것은 스틸컷을 보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은 그 뽀샤시의 한계를 넘어서 '현상 중 사고'라고 생각될 정도로 빛이 과하게 들어와있었다. 나중에 카메라가 줌아웃되면서 운동장은 유리창 밖 풍경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영화의 무대가 되는 교실, 새미..

콘텐츠/리뷰 2022.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