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고: 이 글에는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영화가 2014년 4월 16일을 기억하는 방법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그날의 진실을 파헤치고, 누군가는 남겨진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아이들의 마지막 순간을 담았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 누군가는 희뿌연 꿈을 꾼다. 조현철 감독의 장편 데뷔작 '너와 나'는 희뿌연 운동장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 영화가, 소위 말하는 '뽀샤시 효과'를 집어넣어 촬영했다는 것은 스틸컷을 보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은 그 뽀샤시의 한계를 넘어서 '현상 중 사고'라고 생각될 정도로 빛이 과하게 들어와있었다. 나중에 카메라가 줌아웃되면서 운동장은 유리창 밖 풍경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영화의 무대가 되는 교실, 새미(박혜수)는 낮잠에서 깬다. 멍한 표정의 새미는 불길한 꿈을 꾼 모양이다.
새미에게는 친한 친구 하은(김시은)이 있다. 하은은 하필 수학여행 전날 자전거에 치여서 다리를 다쳤다. 새미는 하은에 관한 불길한 꿈을 꾼 것 같다며 조퇴하려고 한다. 당연히 선생님은 이를 들어줄리 없다. 결국 새미는 몰래 학교에서 도망쳐 하은이 있는 병원으로 향한다. 둘은 즐거운 하루를 보내지만 갈등도 한다. 절친한 여자아이들의 흔한 우정표현과 사소한 다툼이다. '너와 나'는 뽀샤시한 화면 속에서 두 소녀의 사소한 하루를 보여준다. 그런데 영화가 보여주는 '수학여행 전날'의 하루가 좀 이상하다. 메타포가 반복되고 우연이 겹쳐진다. 영화는 마치 새미의 꿈 속에 들어와있는 것 같다. 뽀샤시한 화면은 공간을 더 꿈처럼 만든다. 특히 창 밖을 비추는 장면에서 영화는 더 꿈 같다. 새미와 하은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는 유난히 창문이 등장하고 창 밖 햇살이 역광처럼 들어와 실내를 비춘다. 이 얘기는 창 밖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실내 공간을 마치 현실세계에 속하지 않은 두 사람만의 공간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확실히 이 영화는 4월의 꿈과 같다.
풍경이 보이지 않는 창문과 달리 거울은 상을 좀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주로 새미를 거울에 담아 보여준다. 이 이야기의 흐름대로라면 새미는 하은을 두고 수학여행을 떠났고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 새미는 거울 속에 담겨 '기억'되고 있다. 첫 장면부터 거울 속에 담기 새미를 보여주는 것은 이미 새미가 죽은 아이임을 암시한다. 창문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거울은 기억하고 있다(혹은 사각형 거울에 비친 새미가 배 안에 갇힌 아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 생각은 억지로라도 외면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새미의 눈에 간간히 보이는 어린 두 소녀(마치 새미와 하은의 어린 시절을 연상시키는)는 공원 정자에 걸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려고 한다. 키가 작아서 거울에 자신의 상(狀)을 담을 수 없는 게 다행스럽다. '너와 나'에서는 창문과 거울이 아주 중요하게 등장한다. 특히 이것은 새미와 하은의 관계에서 중요하다. 새미가 하은과 싸우고 다른 친구들과 설빙에서 빙수를 먹을 때, 쇼윈도는 창문 밖 풍경을 꽤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혼자 남은 하은이 버스를 타고 가다 오열할 때도 창 밖 풍경은 선명하다. 창문과 거울을 쫓아가며 영화를 보는 것도 꽤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이 밖에도 영화에는 다양한 메타포가 등장한다. 특히 숫자에 관한 메타포는 영화를 다 보고 추리게임을 해야 할 정도로 관객을 자극시킨다. 예를 들어 카메라가 내내 비추던 '2시 35분', 새미와 하은이 타고 다니던 202번 버스. 굳이 찾아낸 힌트는 세월호 사고 38일째인 2014년 5월 16일 기준 단원고 학생 235명과 교사 7명의 발인이 이뤄졌다. 202번 버스는 아무리 찾아봐도 모르겠다. 이 밖에 두 친구의 우정을 상징하는 몇 개의 메타포도 등장한다. 그저 사소해보였던 것들은 새미가 꿈에서 하은이 됐을 때 명확해진다. 사실 '너와 나'에는 세월호의 시옷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좀 오래전 안산 어딘가를 배경으로 소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라는 게 전부다. 새미가 꿈에서 하은이 되었는데, 그날은 여름이다. 하은은 홀로 잠에서 깨 빈 교실을 나와 텅 빈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새미와 늘 함께 타던 버스에는 하은 혼자 타고 있다. 새미와 하은이 함께 보던 하굣길의 노을은 이제 하은 혼자만 본다. 하은은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라디오에서는 태풍 너구리의 북상으로 구조작업에 난항이 예상된다는 뉴스가 나온다. 태풍 너구리는 2014년 7월초 발생했다. 이 영화가 세월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게 명확해지는 지점이다.
이후의 메타포는 다소 노골적이다. 새미와 하은이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고 헤어지는 장면에서는 주변에 상복을 입은 사람이 잔뜩 서있고 조화가 지나간다. 하은이 입원한 병원으로 돌아온 것인 만큼 설득력은 있지만, 그 풍경이 곱게 보이진 않는다. 그리고 새미는 키우던 앵무새 조이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한다. 풀밭에 잠든 새미에게 주변에서 "사랑해"라는 말이 반복된다. 그리고 새미는 싱그러운 말투로 "다녀올게"라는 말을 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 마지막 대사는 최근 본 그 어떤 대사보다 슬프고 아프게 들린다. 영화가 상징하는 배경을 모두 알게 된다면 이 마지막 장면은 확실한 오열포인트다.
그동안 세월호 이야기를 다룬 극영화는 종종 있었다. 이들 영화는 대부분 세월호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연상시키는 몇 개의 키워드를 배치해뒀다. '너와 나'는 그 영화들 가운데 가장 은유적이고 영화적이다. 지나치게 뽀샤시했던 이 영화의 질감은 8년이 지나 희미해져가는 2014년 4월의 기억을 다루고 있다. 나 역시 세월호에 대한 기억이 이제는 점차 희미해져갔다. 서울시는 올해 7월 세월호 기억공간에 대한 자진철거를 통보했고 전주시도 최근 이와 같은 입장을 전달했다. 세상이 바뀌면서 세월호에 대한 기억도 묻어버리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너와 나'는 기억이 희미해져가는 순간에 등장해 다시 한 번 선명해지도록 만든다. 세월호 참사로부터 8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다소 사고를 외면하는 책임자를 만났다. 세월호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다시 명백해졌다.
'너와 나'는 세월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던 차에 그것을 붙잡게 한다. 그러나 그 이유와 별개로 영화는 소녀들의 통통튀는 우정을 보는 재미가 있다. 하은과 싸우고 노래방에 가서 빅마마의 '체념'을 부르는 새미의 모습과 거기에 맞춰 노래방 화면에 새미와 하은의 수학여행에 대한 상상 장면이 지나가는 건 유난히 재미있다(물론 이 장면 역시 마지막에 이르면 눈물포인트다). 그리고 특별출연하는 박정민은 '헤어질 결심'에 이어서 '짧지만 강한 존재감'을 보여준다(박정민은 진짜 대박이다). 여기에 몽롱한 꿈처럼 드러나는 몇 개의 메타포는 참 영화적이고 예쁘다. 조현철 감독의 감각은 '뎀프시롤-참회록'에서 확인했지만, 장편에 이르러 그것은 더 정제되고 진해졌다. 단편영화를 만들던 감독들이 장편에 이르면 좀 더 세속적이고 타협하게 되는데 반해 조현철 감독은 더 농후하게 실험적이다. 흡사 정진영 감독의 데뷔작 '사라진 시간'을 보는 것 같지만, 영화는 그보다 친절하고 실험적이다. 조현철 감독, 영화 정말 잘 찍는다.
'너와 나'가 언제 개봉할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빨리 관객들과 만났으면 좋겠다. 뽀샤시한 화면과 실험적인 전개탓에 좋지 못한 반응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데뷔작을 만든 조현철 감독은 그저 '연기 잘 하는 배우'로만 두기에는 너무 아깝다(연기도 정말 잘한다). 한국영화의 귀한 자산이 될 이 배우 겸 감독의 장편 입봉작인 '너와 나'는 어떤 반응이 나오건 빠른 시일 내에 많은 관객들이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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