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상한 '아노라'와 '우리들의 교복시절'에 대한 리뷰입니다. 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서양의 전래동화인 '신데렐라'는 계모와 새언니들의 핍박을 견딘 주인공이 하룻밤 마법으로 왕자와 만나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동화'다. 그 시절 어린이들에게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였을지 몰라도 요즘은 '유치한 이야기' 정도로 취급받는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신데렐라'는 뒤에 '콤플렉스'라는 말이 붙어서 신분상승을 꿈꾸는 심리를 대변하는 말이 됐다. '신데렐라'라는 단어에 더 이상 동화적 낭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1981년 콜레트 다울링의 저서에서 유래됐다. 벌써 40년도 더 된 말이지만, 이 말의 유통기한은 꽤 길다. 현대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신분상승의 수단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국한된 줄 알았던 이 문화는 꽤 여러 나라에서 통용되고 있다.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과거보다는 확실히 자본주의적으로 변했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상영작인 '아노라'와 '우리들의 교복시절'은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담고 있다. 어떤 영화는 이 용어를 노골적으로 전면에 드러내고, 어떤 영화는 깊숙한 곳에 이 용어를 숨겨둔다. '신데렐라'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정말 많았다. 당연히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이미 새로울 것이 없는 화두임에도 불구하고 '아노라'와 '우리들의 교복시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이유가 있다. 동화는 언젠가 끝이 나고 그 끝은 해피엔딩이 아닐 수 있다. 이 당연한 걸 현대사회에서는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주기적으로 언급해줘야 한다. 네오는 사실 모피어스에게 주기적으로 빨간약을 처방받아야 한다. 오늘날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아노라'는 뉴욕의 스트립클럽에서 시작한다. 이 클럽의 매니저는 아노라(마이키 매디슨)가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는 점을 들어 그녀에게 러시아인 손님을 상대해달라고 한다. 방금 근무를 마치고 들어와 밥을 먹으려던 아노라는 조금 짜증이 나지만, 그래도 손님을 받는다. 갓 스무살을 넘긴 러시아 손님 바냐(마르크 에이델슈타인)는 이 클럽의 에이스 아노라가 마음에 들었고 VIP 서비스도 받는다. 아노라와 연락처를 교환한 바냐는 그녀를 자신의 호화저택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거액을 제시하며 일주일동안 자신과 만나줄 것을 제안한다. 바냐와 아노라 일행은 라스베이거스로 떠나 화려한 여행을 즐긴다. 그러다 바냐는 아노라에게 진지하게 청혼을 한다. 바냐는 러시아 재벌이었떤 아버지의 회사로 출근하는 게 싫어 미국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인인 아노라와 결혼하는 것도 방법이다. 물론 그게 청혼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아노라는 바냐의 청혼을 의심하다가 결국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사건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아노라'를 요약하자면 부잣집 남자와 결혼한 신데렐라가 현실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꽤 긴 시간을 할해하는 이 로드무비는 그리 행복하지 않다. 겨울의 공기는 차갑고 어리버리한 직원들은 우당탕탕 길을 떠나지만, 그 길의 끝에는 현실로 돌아오는 것만이 남아있다. 유일하게 아노라 본인만이 끝까지 신데렐라 스토리를 꿈꾸지만, 현실은 비정하다. '아노라'는 그 비정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유쾌하게 보여준다. 영화가 유쾌하면 유쾌해질수록 결말은 더 허무하고 쓸쓸하다. 그렇다면 관객은 왜 '아노라'를 봐야 할까? 아노라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끝나는 과정을 담은 '아노라'에는 바냐보다 훨씬 중요한 인물이 있다. 바로 이고르(유리 보리소프)다.
이고르는 바냐를 잡기 위해 고용된 러시아인 직원이다. 바냐 아버지의 심복인 토로스(카렌 카라굴리안), 가닉(바체 토프마샨)과 함께 이 모험을 함께 한다. 이고르는 과묵하고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는 심성이 착한 사람이지만, 명령 때문에 아노라와 몸싸움을 벌이고 그녀를 묶어두기도 한다. 허드렛일을 하던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게 된 아노라를 챙기는 역할을 한다. 영화의 초반부에 중요하지 않았던 이고르는 후반에 이르면서 점점 중요해진다. 그러더니 마지막에는 아노라가 이고르의 품에 안겨 엉엉 울기까지 한다. 아노라는 영화 내내 당차고 과감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노라는 그 누구에게도 보여진 적이 없는 모습이다. 아마 그녀의 가족들도 보지 못한 모습일 것이다. 그런 모습을 아노라는 이고르 앞에서 보여준다. 이야기는 비정한 현실로 돌아왔지만, 아노라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 셈이다.
동화의 끝에는 비정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아노라'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노라가 돌아온 뉴욕의 집 앞 거리는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다. 아노라는 왕자와의 일탈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 현실은 마냥 비정하지는 않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이고르는 정말 멋진 사람이다. 상처가 많았는지 조금 삐딱하고 센 척 하려는 아노라를 품어줄 수 있을만큼 듬직하다(마지막 장면에서는 실제로 아노라를 안아준다). '아노라'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끝내길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과감하게 그것을 끝내라고 한다. 동화 속 세상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이 두려울 수 있어도 그 과정에서, 혹은 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새로운 이야기가 씌여지기 마련이다. 삶의 엔딩은 죽어야 끝난다. 죽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계속된다.
'우리들의 교복시절'은 1997년으로 향한다. 지역 내 명문 여자고등학교인 제1여고 입학시험에서 떨어진 아이(얀페이첸)는 엄마의 강압에 못이겨 제1여고 야간으로 입학하게 된다. 같은 교복을 입지만, 주간과 야간은 대우가 다르다. 아이는 다행히 주간 학생 민(클로에 시앙)과 친구가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민과 교복을 바꿔 입으며 주간인 척 할 수 있게 된다. 탁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아이는 어느날 제1고 학생 루커(이타이 치우)를 만나고 그에게 반하게 된다. 그러나 루커는 민과 같은 학원 친구이고 아이와 민, 루커는 셋이 어울려 다니게 된다. 루커는 아이가 제1여고 주간 학생인 줄 알고 있다. 그때부터 신분상승을 전제로 한 아이의 거짓말은 시작된다.
'우리들의 교복시절'은 거짓말의 영화다. 가난한 집에서 사는 아이는 부잣집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신분상승을 위한 거짓말을 한다. 이는 전혀 의도적인 게 아니다. 주간 학생으로 오해받기 시작하고 루커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아이는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거짓말은 겉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아이의 의도와 다르게 불어나는 거짓말은 그녀를 신분상승의 세계로 이끈다. (그 유명한) 대만 청춘멜로 장르라면 이 시점에서 아이를 극적인 신데렐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아이에게 비정할 정도로 가혹한 순간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동화같은 신분상승의 이야기는 끝나고 어른이 되는 성장통이 시작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이 영화는 아이의 성장통을 냉정하게 그리지 않는다. 아이는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이 들통나버리는 끔찍한 순간을 겪는다. 이는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서, 자신의 초라한 신분이 까발려져서 수치스러운 경우다. 그런 최악의 순간 이후에 아이는 가족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 그 후에 '신분'이라는 허상을 선사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아노라'보다 더 성숙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의 교복시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분의 허상을 보여준다. 영화 속 제1여고의 주간반과 야간반은 명찰의 색깔로 구분된다. 그 색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고, 때로는 하찮은 것이다. 잘생긴 남학생 루커도 그만의 아픔이 있고 사연이 있다. 돈은 가난한 사람을 좌절로 이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은 너무 당연한 명제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모두가 살아가는 이유는 돈이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돈이 곧 권력이라는 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권력은 반드시 움직인다. 돈도 권력과 마찬가지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가지지 못했다고 가진 자를 동경할 필요가 없고, 가졌다고 가지지 못한 자를 깔볼 이유도 없다.
...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로 글을 마무리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들의 교복시절'이 하고 싶은 이야기도 이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배경은 1997년이라는 점은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거슬린다. 밀레니엄의 시대를 마주하던 그 시절을 기억한다. 새로운 천년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가득했던 시절이다. IMF의 광풍이 몰아쳤지만, 그만큼 그 시절은 무한한 기회가 있던 때였다. IMF는 우리 사회에 양극화를 극대화시켰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됐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졌다. 돈은 더 절대적인 가치가 됐고 돈의 엉덩이는 이전보다 더 무거워졌다. 20세기의 막바지에서 건넨 메시지는 21세기의 관객에게 희망을 줄까? 아니면 과거와 다른 현실에 절망을 줄까? 아이가 어느 대학에 붙었는지 끝까지 알려주지 않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이의 미래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 그 가능성은 희망과 절망 갈래길 중간에 서 있다.
신데렐라의 동화를 떠올려보자. 계모와 언니들의 구박을 받으며 초라하게 살던 신데렐라에게 요정이 찾아와 기회를 줬다. 기회를 얻은 신데렐라는 무도회에서 왕자를 만났다. 요정의 마법은 끝이 났지만, 왕자는 요정을 잊지 못해 그녀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결국 신데렐라는 예쁘다는 소리다. 마냥 행복한 것만 같은 동화인 신데렐라는 결국 기회를 얻은 예쁜 소녀인 셈이다. 신데렐라가 요정의 마법 덕분에 무도회에 떠날 때, 다른 곳에서 계모와 언니들의 구박을 받으며 지내는데 요정도 찾아오지 않는 또 다른 소녀들을 생각한다. 기회는 마법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동화는 그저 동화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신데렐라일까?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글로벌 경기침체가 심화되고 있다. 기후변화는 심각해지고 있고 지구종말에 대한 공포도 확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은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다양한 상품을 준비하고 이를 광고한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은 경제적으로, 혹은 환경적으로 불안에 떨고 있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불안이 커지면 사람들은 도피처를 찾게 된다. 어쩌면 이 세상이 멀티버스일 수 있다는 생각, 혹은 멋진 영웅이 나타나 지구를 구해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이런 불안을 자극해 돈을 벌 것이다. 그러나 독립영화들까지 그 트렌드에 동참할 이유는 없다. '아노라'와 '우리들의 교복시절'은 불안을 팔아 장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다른 길을 대신한다. 신데렐라의 드라마 대신 익숙한 집에서, 스스로의 노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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