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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 '진리에게' - 루머의 루머의 루머

불닭국밥 2023. 10. 16. 09:00

※ 이 글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넷플릭스 시리지 '루머의 루머의 루머'와 관련이 없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소문만 많이 들었다. 재밌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긴 호흡의 드라마를 잘 못 보는 편이라 아직 시도조차 못하는 편이다. 드라마 관람 유무를 떠나서 나는 이 제목이 참 마음에 든다. 심지어 영어 원제인 '13 REASONS WHY'와도 다르지만, 여러가지로 써먹을 지점이 많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 글에도 써먹었으니 이 한글제목을 지은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천재적이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라는 제목은 픽션 바깥에서도 쉽게 써먹을 수 있다. 어쩌면 '논픽션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이 제목이 픽션으로 들어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논픽션의 세계'가 '정보의 바다'라면 이제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진실의 침수'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소셜 미디어와 커뮤니티를 통해 재생산되고 왜곡된 진실은 과거에 '소문(혹은 루머)'라고 불렀던 그것들보다 더 강하고 위협적인 파급력을 자랑한다. 길게 강조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과 정윤석 감독의 '진리에게'는 '루머'라는 단어에서 출발한다. 전자는 진실을 둘러싼 루머를 한꺼풀씩 벗겨내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다큐멘터리인 '진리에게'는 과감한 질문을 던지면서 루머에 갇혀버린 한 사람을 끄집어낸다. 정보가 넘쳐나고 엔터테인먼트의 소비가 점점 간결해지는 세상에서 영화라는 매체는 어쩌면 낡은 엔터테인먼트인지도 모르겠다. 이 낡고 낡은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은 소셜 미디어의 폐해 중 하나인 '루머'에 정면으로 맞선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사소한 고민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기후변화와 경제위기, 전염병 등 수많은 고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고민들에 비하면 '루머의 과잉생산'은 다소 사적이다. 그러나 이 고민은 개인을 조금 더 온전하게 하는 출발점이다. 온전한 개인이 모인다면 더 큰 고민에 대해 합리적이고 현명한 답을 내놓을 수 있으리라. 


영화 '괴물'.

'괴물'은 젊은 싱글맘 사오리(안도 사쿠라)로부터 시작한다. 남편을 일찍 사별하고 어린 아들 미나토(쿠로카와 소야)를 혼자 키우는 사오리는 어느날부터 이상해진 아들의 모습에 당황한다. 다쳐서 돌아오는가 하면 물병에서 흙이 나오고 갑자기 머리를 자르고 스스로 자책하기도 한다. 그런 아들의 모습에 사오리는 학교폭력을 의심하고 미나토는 호리 선생님(나가야마 에이타)이 그랬다고 말한다. 사오리는 항의하기 위해 학교로 찾아가지만, 교장선생님 후시미(다나카 유코)의 미지근한 태도에 오히려 분노한다. 아들이 당한 부당한 폭력에 홀로 싸우는 듯한 사오리의 모습은 이후 호리 선생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다시 전개되면서 급반전된다. '괴물'은 이런 식으로 하나의 사건을 여러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관찰한다. 이 때문에 일부 관객들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라쇼몽'과 엄연히 다르다. '라쇼몽'은 하나의 사건을 여러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과 위치에서 관찰하고 서술한다. 플래시백 형식이 중요한 '라쇼몽'에서 누군가의 증언은 왜곡되기도 한다. 그러나 '괴물'에서 틀린 판단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물들 각자가 주어진 정보 안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했다. 

인물들의 정보가 제한적이라는 점은 이 영화의 핵심이다. 인물들은 제한적인 정보 안에서 사건을 판단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지만, 정보의 이면을 찾아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정확히는, 사건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있어 정보의 이면을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정보를 왜곡하려는 자도 있고 특수성이 있는 정보를 일반적인 사례에 빗대어 판단하려는 자도 있다. 정확한 정보의 습득과 판단은 다른 사람에 의해 방해받는다. 만약 정보의 습득을 방해받았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더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고 할 것이다.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며 여기에는 좋지 않은 결과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괴물' 속 인물들은 자신이 정보의 습득을 방해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는 사건의 기승전결을 판단할 정보는 (정보의 정확성과 관계없이) 충분히 제공받았기 떄문이다. 정보가 넘쳐나는 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정보는 사건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정보의 범람은 정확한 정보의 습득을 방해받게 한다. 조지 오웰의 '1984'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미래에 더 근접한 것처럼, 정보의 범람은 잘못된 판단을 하게 하고, 이는 한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위험한 상황을 만든다. 

정보의 범람이 부르는 위험한 상황에 대해 경고하는 영화는 많다. 최근 영화 중에서는 아담 맥케이의 '돈 룩 업'이 대표적이다. '돈 룩 업'은 정보의 범람이 부른 그릇된 판단으로 결국 모두가 종말을 맞이하는 대환장을 다룬 영화다. '괴물'은 그런 파국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정보의 범람이 불러온 오해가 해결되고 모두가 진실을 향해 찾아가지만, 결국 진실은 흙더미에 매몰돼있다. 이 영화의 결말은 몇 가지 해석을 낳을 수 있다. 그 해석은 긍정적일 수 있지만, 필자는 부정적으로 본다. 정보의 범람이 낳은 비정한 세상에서 긍정적인 결론이 가능할까? 올더스 헉슬리는 이미 90여년전에 그것을 '디스토피아'로 규정지었다. 그 디스토피아는 이제 현실이 됐다. 


영화 '진리에게'

'진리에게'는 연예인 최진리를 인터뷰하면서 시작한다. 요즘 유튜브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패션매거진 인터뷰 영상처럼 팬시하고 세련된 느낌의 배경에서 진행되는 인터뷰지만, 질문들은 그렇지 않다. 정윤석 감독은 진리를 인터뷰하기 위해 14년간 그녀가 언론매체를 대상으로 진행한 모든 인터뷰를 뒤졌다. 그리고 어떤 매체에서도 한 적 없고,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질문을 그녀에게 건넨다. 질문들은 진리가 조금 더 진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게 한다. 연예인 최진리는 늘 루머의 중심에 있었다. 매체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보여지는 이미지는 그녀에 대한 기이한 프레임을 만들었다. 변명을 했을 법도 하지만, 진리에게는 그리 많은 변명이나 해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영화 '진리에게'는 최진리에게 주어진 처음이자 마지막 자기변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진리에게'는 몇 개의 챕터로 나눠진다. 이 챕터는 '오즈의 마법사' 속 도로시의 여정과 같다. '도로시'는 2019년 발표한 설리의 솔로앨범 수록곡이다. '진리에게'는 이 노래에 집중해 애니메이션으로 뮤직비디오까지 보여준다. '도로시'의 가사에 빗대어 '진리에게'는 타인에 의해 수백가지 얼굴을 갖게 된 진리가 오즈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캔자스 시티로 돌아간 것으로 표현한다. 사실 이 영화는 진리에게 씌워진 루머들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 진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정윤석 감독의 전작들('논픽션 다이어리',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눈썹')을 챙겨봤지만, 이처럼 한 사람의 내면으로 직접적이고, 깊게 파고드는 경우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깊은 곳에서 마주한 최진리는 사실 단 한 장면으로 정리된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진리는 조리있게 대화를 이어가지 못한다. 질문에 대해 고민도 길어지고 단어를 선택하는 것도 신중히 한다. 영화는 이를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그 때문에 관객들은 다소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다 진리의 셀프카메라와 함께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진리는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말 잘하는 법'을 검색하고 있었다. 진리 본인 역시 그날의 인터뷰가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영화에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질문이 등장한다. 조리있게 대답하기도 쉽지 않은 질문들이다. 진리는 분명 일에 대한 욕심이 있는 사람이다. 영화는 틈틈히 넷플릭스 '페르소나:설리'의 촬영현장을 통해 일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점점 인터뷰어와 가까워지는 모습을 통해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인터뷰어였던 정윤석 감독은 진리에 대해 '배려가 깊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장면과 초현실적 영상들이 더해지면서 영화는 인간 최진리만 남기고 (루머를 포함한) 모든 것을 휘발시켜버린다. 영화가 끝났을 때는 인간 최진리만 기억에 남을 뿐, 연예인 설리의 행적은 이미 없는 일이 돼있다. 이미 비극이 된 사람에 대해 구태한 루머를 더 끄집어내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화 '진리에게'는 정보가 범람한 세상에서 루머에 의해 비극을 맞은 한 사람을 추억한다. 한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정보가 사라진 '한 사람'을 보여준다. 타인을 판단하는데 정보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정보가 없어도 타인을 판단할 수 있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긴 침묵에서, 혹은 붉게 물들어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인간의 삶은 수학공식처럼 딱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옥에도 변호사가 필요하다.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은 비극적이다(그렇다고 정보가 통제된 세상도 행복하진 않다). 우리는 정보로 타인을 판단하고 사건을 바라본다. 정보는 가장 간편하고 합리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사건에는 언제나 사람과 관계가 있다. 사람과 그 관계들은 정보의 조합보다 훨씬 복잡하고 합리적이지 않다. 정보가 범람하는 세상이 비극적인 이유는 복잡하고 미묘한 인간, 그들의 관계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 '신과 함께'는 지옥의 시스템을 부정하는 이야기다. 지옥은 인간이 살아서 지은 죄를 심판하고 벌하는 곳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수학공식처럼 딱 떨어지지 않는다.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관계는 '정보'만으로 결코 판단할 수 없다. 

숏폼 콘텐츠들이 지배한 소셜 미디어가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이 된 세상에서 영화가 건네는 이런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1분 내외의 영상이 전하는 정보 대신 2시간 내외의 영화가 전하는 정보는 좀 더 솔직하고 합리적이다. 여기서 굳이 '영화의 존재 이유'를 말할 필요는 없다. 대신 한 사람(혹은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왜 반드시 필요한지도 알아야 한다. '괴물'과 '진리에게'는 루머의 루머의 루머를 벗겨내어 진실을 마주하게 만드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