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은 관객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화려했던 영화의 에필로그는 쓸쓸한 피아노 선율과 함께 막을 내린다. 붉은 빛과 푸른 빛이 뒤엉킨 L.A의 석양처럼 찰나의 순간은 지나가고 음악은 끝이 난다. 그와 함께 아름다웠던 남녀의 성공기도 끝나고 관객들은 극장을 나선다. '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은 마치 영화보기 자체를 사소한 허상처럼 만들어버린다. 마지막 장면 속 남녀의 엇갈림과 별개로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을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는 엇갈렸기 때문에 그 마지막 장면을 좋아한다. 공허한 감정은 긴 여운을 남긴다. 극장 밖으로 나섰을 때 인상적이었던 몇 개의 장면과 음악은 휘발되고 공허한 감정만이 오랫동안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은 영화가 관객에게 더 오래 기억되는 방법이다. 이 마지막 장면 때문에 '라라랜드' 속 사랑스런 밤에 춤추던 남녀와 고속도로의 군무, 성공으로 향하던 청춘의 열정은 헛헛한 감정이 느껴져 더 애잔하다. 영화를 보면서 그토록 애잔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데이미언 셔젤은 '라라랜드'에 이어 다시 한 번 할리우드로 향하며 영화 '바빌론'을 만든다. 이번에는 1920년대다. 무성영화 시대의 할리우드는 그 나름대로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영광을 다소 천박하게 표현한다. 어느 관객의 말마따나 시작부터 똥을 갈기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오줌을 갈기고 기어이 구토도 한다. 마치 할리우드의 민낯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적나라하게 지저분하지만, 정작 '바빌론'은 할리우드의 민낯에는 관심이 없다. 더군다나 이건 무려 100년전의 할리우드다. '바빌론'은 무성영화 시대의 거물인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을 다루는 대신 다소 천박하고 저급한 스튜디오 영화로 향한다. 석면가루가 아무 거리낌없이 흩날리고 코르크로 얼굴 분장을 하던 시절, 사람 하나 죽어도 아무 죄책감없이 사실을 은폐하기 바빴던 야만적인 시대의 할리우드에는 당연히 똥, 오줌을 뿌려대도 어색할 것이 없다. 데이미언 셔젤이 바라본 1920년대의 할리우드에는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의 영광이 아닌 저급하고 천박한 탐욕이 있었다(실제로 1939년 영화인 '오즈의 마법사'에서도 아동학대와 노동착취 유독성 물질을 활용한 분장이 있었으니 할리우듸 천박함은 그 후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바빌론'은 할리우드가 무성영화 시절의 영광을 어떻게 쌓아올렸는지 보여주면서 중요한 시대를 다루고 있다. 1927년 '재즈 싱어'의 등장으로 비롯된 유성영화의 등장이다. 이 시기를 다룬 영화는 '바빌론' 이전에도 있었다. '바빌론'에도 레퍼런스로 등장한 영화이며 '바빌론'이 오마주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사랑은 비를 타고'다. '사랑은 비를 타고'는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빚어진 할리우드의 혼란을 다룬 소동극이다. 주류 스튜디오인 MGM에서 만든 영화답게 로맨스와 코미디, 춤과 노래가 있다. 당연히 이야기는 해피엔딩이고 훗날 영화 역사상 최고의 뮤지컬 영화가 됐다. '바빌론'이 '사랑은 비를 타고'로부터 진 빚은 꽤 상당하다. '바빌론' 속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는 '사랑은 비를 타고'의 돈 락우드(진 켈리)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잭의 친구 조지(루카스 하스)는 '사랑은 비를 타고' 속 코스모 브라운(도널드 오코너)이 된다. '바빌론'에서 잭과 조지의 관계는 '사랑은 비를 타고' 속 그 단짝친구를 연상시킨다.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파티장을 전전하는 배우 지망생 캐시(데비 레이놀즈)는 당연히 '바빌론'의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가 된다. 주요 인물 중 다수 '사랑은 비를 타고'에 빚을 지고 있지만 매니(디에고 칼바)만큼은 빚을 지고 있지 않다. 1952년 영화에서 멕시코 불법 이민자를 출연시킬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바빌론'은 '사랑은 비를 타고' 속 유쾌하고 사랑스러웠던 인물들을 대거 출연시키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모자라거나 천박하다. 혼란의 시대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동화같은 이야기는 '바빌론'에서는 취급하지 않는다. 무성영화 시절의 스타 돈 락우드는 유성영화의 시대를 슬기롭게 극복했지만, 잭 콘래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캐시 역시 기어이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았지만, 넬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성공의 길을 걸을 것 같았고 재능을 인정받았던 매니와 시드니(조반 아데포)는 유성영화 시대의 잊혀진 인물이 됐다. '바빌론'은 마치 '사랑은 비를 타고'의 절망편과 같았다. 무성영화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 그 누구보다 변화하는 시대의 영광을 누린 사람은 없었다. 영화 속 평론가 일리노어(진 스마트)의 말처럼 시대를 올곧게 살다간 사람은 새로운 시대에 도태돼버렸고 바퀴벌레처럼 납작 엎드린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에서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데이미언 셔젤은 왜 이런 이야기를 지금 꺼냈을까? 100년전 할리우드의 대격변을 관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100년 후 현재의 관객들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까? 어쩌면 '바빌론'은 OTT 시대에 대한 데이미언 셔젤의 응답일지도 모르겠다. 똥오줌이 난무하는 1920년대를 관통한 매니와 넬리는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대화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넬리는 스타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관행을 견디지 못했고 매니는 그 관행들 속에 살면서 열정을 잃었다. 거대한 시스템은 100년전부터 열정을 착취해왔고 그렇게 할리우드라는 왕국을 세웠다. 이제 왕국은 OTT라는 이름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미 OTT의 등장 이전부터 미국은 언론재벌이 스튜디오를 대부분 집어삼켰다. 영화는 이전보다 더 거대한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고 거기에는 창작자의 열정이 남아있지 않다. 월트디즈니라는 제국군은 무덤에 있던 스타워즈를 부활시켰고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라는 공산품을 찍어낸다. 상업영화는 더 이상 'Cinema'가 아닌 'Attraction'이 돼버렸고 관객의 이야기는 더 이상 극장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빌론'과 별개로 OTT, 상업영화와 관련해 늘 가지고 있던 생각이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 극장은 침체기를 걷고 있고 사람들은 OTT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때 OTT가 선사하는 영화경험은 모두에게 평등할까? 누군가는 88인치 OLED TV로, 누군가는 싸구려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그 두사람의 영화경험은 과연 평등할까? 이런 고민은 멀티플렉스로도 확장할 수 있다. CGV용산아이파크몰 아이맥스관이나 메가박스 코엑스 돌비시네마관은 영화팬들에게 성지가 됐다. 블록버스터 영화에 대해 최적의 영화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만큼 지방에서도 영화를 보기 위해 이곳으로 몰린다. 만약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동네 작은영화관에서 본 것과 용산 아이맥스관에서 본 것은, 같은 영화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빌론'에서 매니는 마지막으로 극장에 앉아있다. '사랑은 비를 타고'가 상영되던 극장에서 누군가는 팝콘을 먹고 누군가는 키스를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영화를 본다. 극장에는 영화와 함께 관객의 스토리가 존재하고 그렇게 영화와 관객은 동등한 위치로 극장에 있다. 그리고 모든 관객은 동일한 영화경험을 한다.
'바빌론'의 엔딩은 극장영화 시대의 종말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필름의 롤이 다 돌아간 것처럼, 3시간이 넘는 긴 영화는 영화역사를 통째로 재생하며 끝을 맺는다(이 장면에서 '터미네이터2'와 '아바타'가 등장한 것은, 데이미언 셔젤은 제임스 카메론을 극장영화 시대의 마지막 거장으로 여기는 듯하다. 실제로 그가 만든 '아바타: 물의 길'은 CG 기술에도 장인정신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한편의 영화가 끝난 것처럼 '바빌론'에서 극장시대의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제 극장문을 나선 관객은 넷플릭스를 켜고 다른 영화나 드라마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가 개봉하면 용산 아이맥스관으로, 코엑스 돌비시네마관으로 향할 것이다. '바빌론'은 화려한 영상과 음악으로 원초적인 영화경험을 선사한다. '라라랜드'와 같은 뮤지컬 영화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볼거리를 선사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극장영화 시대의 마지막 장송곡이 될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 장송곡을 들으며 온전히 슬퍼할 필요는 없다. '바빌론'에서 일리노어가 잭에게 한 말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성영화 시대의 도래 이후 잭 콘래드의 시대는 끝이 났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다. 결국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 잭 콘래드는 사람들에게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50년 후, 100년 후에도 잭 콘래드의 영화는 남아있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 영화로 이야기를 할 것이다. 데이미언 셔젤에게 OTT의 시대는 마치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뀌는 혁명과 같았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 역사에서 이런 혁명은 종종 있었다. 텔레비전이 처음 등장했던 시기, 필름의 시대가 가고 디지털의 시대가 왔던 시기. 이 모든 시대에 사람들은 "우리가 알던 영화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화와 극장은 그 모든 위협을 이겨내고 기어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OTT, MCU의 시대에는 조금 다를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경험이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와 극장은 몰락하기보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진화할 것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했던 영화들은 여전히 남아 기억될 것이다. 매니가 기억하는 무성영화 시대의 추억처럼, 똥오줌이 휘날리고 사람이 죽어나가도 매니가 기억하는 넬리, 잭처럼 낭만이 있던 그 시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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