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리뷰

[스포주의] '본즈 앤 올' - 살점을 파고 들어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

불닭국밥 2022. 11. 15. 13:30

영화가 외로움을 표현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무인도에 떨어뜨려 배구공과 친구를 하게 하거나 도심 한 가운데 작은 섬에 고립시킨다. 혹은 AI와 대화하게 하거나 리얼돌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게 한다. 더 예전에 어떤 사람은 집안의 모든 사물들과 대화를 했다(그러면서 그는 갑자기 뚱뚱해진 비누와 얼굴이 변한 인형을 눈치채지 못한다). 어떤 외로움은 너무 먼 세계에 있어서 쉽게 체감이 되지 않는다. 마치 외로움은 작가가 만들어 낸 허상처럼 허공 위를 헤매고 있다. "세상에 누가 배구공을 친구삼아 대화하냐"며 비웃겠지만, 이미 그 영화는 많은 관객들이 공감했다. 정말 너무 외로우면 배구공, 파인애플 통조림과 대화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외로움의 끝은 어디일까? 그 물음의 답이 궁금해질 때 쯤, 루카 구아다니노는 '본즈 앤 올'이라는 영화를 들고 나타났다. 척 봐도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것 같은 이 영화는 '카니발리즘'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영화의 러닝이 흘러갈수록 그 잔인한 식인은 애처로워지고 소년과 소녀의 극단적 외로움이 전달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벌판 위에 발가벗은 두 청춘을 마주했을 때, 부디 그들이 그곳에서 행복하길 바란다는 생각과 한 줌의 안식처조차 허락되지 않았다는 슬픔이 교차된다. '본즈 앤 올'은 외로움의 끝으로 향한다. 그들은 하나이거나 둘이거나, 혹은 그들이 집단을 형성하거나, 그 어느 순간에서도 외롭다. 

'본즈 앤 올'은 식인을 하는 소녀 매런(타일러 러셀)으로부터 시작된다. 매런은 어릴 때부터 보모를 잡아먹으며 식인을 했다. 왜 식인을 하게 됐는지 매런의 아버지(안드레 홀랜드)도 알지 못한다. 그저 매런이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잡아먹었다면 도망다닐 뿐이다. 어느 날 아버지의 감시에서 벗어나 친구집에 놀러간 매런은, 자신도 모르게 친구의 손가락을 먹었다. 그리고 늦은 밤, 매런과 매런의 아버지는 마을을 떠난다. 그리고 다음날, 아버지는 매런에게 편지와 어머니의 인적사항이 담긴 출생증명서를 남기고 떠난다. 매런은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됐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매런은 자신의 어머니가 누군지 궁금했다. 어머니의 이름과 주소를 알게 된 매런이 할 일은 당연히 어머니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먼 길을 떠나는 매런 앞에 몇 명의 동족이 나타난다. 식인에 대한 풍부한 이해가 있지만, 조금 기괴해보이는 설리(마크 라이런스)를 만나고 그에게서 도망친다. 그리고 동족인 리(티모시 샬라메)를 만나고 그에게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함께 떠나기로 한다. 매런과 리는 그렇게 가까워진다. 다만 설리는 멀리서 매런의 냄새(식인종의 냄새)를 맡고 쫓아와 그녀에게 집착한다.

'본즈 앤 올'에서 식인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갖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식인을 하지만, 일반적인 음식도 잘 먹는다. 뱀파이어나, 흡혈귀, 좀비처럼 묘사될 수 있지만, 그들은 사람들 속에 어우러져 사는 정상인일 뿐이다. 즉 식인을 하지 않아도 삶을 이어갈 순 있다. 다만 식인을 함으로써 안정을 찾고 포만감과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영화에서 식인은 날 때부터 가진 남들과 다른 습성, 혹은 취향으로 묘사된다. 이는 '소수자'라고도 정의내릴 수 있다. 성적 취향을 식인과 동일시 하려는 건 아니다. '본즈 앤 올'에서도 성소수자를 잡아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 세계에서 식인은 성소수자보다 더 고립된 취향을 가진 소수자다. 동족을 잡아먹는 취향이라면 당연히 고립될 수밖에 없고 극단적으로 고립시키려고 들 것이다. 즉, 이들이 가지고 있는 남들과 다른 이 취향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고 절대 환영받을 수 없는 것이다. 제 아무리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식인을 하는 사람까지 품지는 못할 것이다. '본즈 앤 올'에서 식인은 극단적인 외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본즈 앤 올'이 고통스러운 지점은 매런과 리도 자신들의 소수자적 취향을 잘 알고 있다. 억제할 수 없는 취향으로 인한 고통을 스스로 잘 알고 있고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도망친다. 매런의 아버지와 어머니, 매런, 리는 모두 누군가로부터 도망친 적이 있다. 누구도 그들을 밀어낸 적이 없지만, 그들은 도망쳤다. 상대가 나를 거부할 수 있다는 두려움, 다른 가치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도망치는 행위는 스스로를 더 깊은 외로움으로 빠뜨린다. 매런과 리도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도망치는 행위를 멈출 수는 없다. 세상과 절대 섞일 수 없고, 쉽게 멈출 수도 없는 '식인'이라는 고약한 취향 때문이다. 

매런은 가장 비극적인 미래를 봤다. 식인이라는 고약하고 고통스러운 취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양팔을 먹어치우고 스스로 정신병원에 갇힌 매런의 어머니 자넬(클로이 세비니)를 만난 후다. 자넬은 매런 역시 자신처럼 고통스러운 취향에 괴로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죽음만이 거기서 해방되는 길이라고 믿고 자신을 찾아온 매런을 공격한다. 자넬과 다르게 찾아올 수 있는 매런의 미래는 설리다. 설리는 식인의 전문가이며 자신의 규칙도 확고하다. 그리고 자신이 먹어치운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모은다. 그 길이만 2m가 넘는다. 설리는 식인의 전문가지만, 여전히 혼자다. 그가 매런에게 집착하는 이유도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 때문이다. 만약 매런이 혼자 있었다면 그는 자넬이 되거나 설리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와 함께 다니면서 둘은 장밋빛 미래를 꿈꾼다. 사람들 속에 어울려서, 사는데까지 살아보는 일. 

식인의 행위는 그렇게 극복될 것 같았다. 도시에서 직장을 구하고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사람들 속에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멀리서도 냄새를 맡는 설리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설리의 집착은 마치 떨쳐낼 수 없는 식인의 취향과 같다. 더 이상 사람을 먹지 않으려고 해도, 결국은 사람을 먹게 될 거라는 끔찍하고 비극적인 경고. 식인은 마치 업보처럼 이들의 곁에 돌아왔다. 보금자리는 마치 꿈처럼 사라지고 두 남녀는 네브라스카의 벌판 위에 벌거벗은 채 서로를 껴안고 있다. 한줌의 안식처조차 허락되지 않은 가여운 청춘들은 그제서야 고약한 식인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세상은 끝내 그들을 받아주지 못했다. 인간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자연의 한 가운데서 오직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기댈 뿐이다. 

'본즈 앤 올'은 식인이 소재인 만큼 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장면이 여럿 등장한다. 조금은 지루하고, 많이 끔찍한 식인 장면들이 지나갈 즈음 지독한 외로움이 밀려온다. 도망쳐야 하는 운명, 끝내 찾아올 비극과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청춘의 몸부림. 매건이 죽어가는 리를 먹어치울 때, 그리고 텅빈 보금자리와 광활한 벌판 위의 두 남녀. 이 장면들은 당장 눈물이 날 것처럼 외롭고 쓸쓸하다. 세상이 받아줄 수 없었고 세상에 어울릴 수도 없었던 외로운 두 남녀의 탈주를 보는 일은 눈물나게 처연하다. '본즈 앤 올'은 식인장면이 즐비하지만, 지독하게 슬픈 영화다. 티모시 샬라메의 눈빛이 슬프고, 타일러 러셀의 뜀박질이 슬프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시선,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몸짓. 그 모든 게 영화 내내 절절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외로운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 조금은 세상에 스며들려는 용기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로 극단적인 취향은 아닐테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