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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운명론 - '플래시' vs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불닭국밥 2023. 6. 28. 15:43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MCU) 이후 '멀티버스'라는 개념이 꽤 일반적으로 바뀌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 개념을 차용하면서 가끔 '멀티버스'라는 개념은 과학의 영역을 넘어 어딘가에 실존하는 개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멀티버스는 시간의 영역에서 인식된다. MCU식 표현을 빌리자면 시간은 일직선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쓰여진다(사실 이런 개념은 '백투더퓨쳐2'에서 먼저 등장했다). 그러니깐 "오늘 나는 커피를 마신다"라는 선택을 한 유니버스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를 선택한 유니버스가 따로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커피에 대해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많은 이야기들이 인과론에 따라 다르게 쓰여진다. 하나의 선택이 원인이 돼서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고 다른 결과들은 각기 다른 유니버스에 남아있다는 의미다. 

이런 인과론은 '운명론'과도 통한다. 현재의 어떤 결과는 과거의 필연적 사건에 따른 것이다. 이 경우 필연적 사건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만약 현재에 불만을 느낀 누군가가 이를 바꾸고자 한다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운명을 바꿔야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현재뿐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 개봉한 영화 '플래시'와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이런 선택과 결과에 대한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두 소년의 결정은 마치 "운명을 바꿀 것인가"라는 선택지에 대해 내놓은 답변처럼 보인다. 두 소년은 같은 대답을 내놨지만, 그 결과는 다르다. '플래시'의 배리 앨런(에즈라 밀러)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불러온 현재를 부정하고 과거를 바꾸려고 한다. '스파이더맨'의 마일즈 모랄레스(샤메익 무어) 역시 스파이더맨의 돼야 하는 필연적 사건을 부정하고 이를 바꾸려고 한다. 

두 소년은 같은 대답을 내놨지만,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배리 앨런은 어머니가 살아있는 유니버스에 도착했지만, 그 곳에는 슈퍼맨도, 원더우먼도, 아쿠아맨도 없다. 당연히 플래시도 없어야 하는 세상이지만, 배리 앨런의 개입으로 플래시는 탄생했다. 어머니가 살아있는 유니버스에서 꾸려진 팀은 저스티스 리그에 비하면 한결 허약해보인다. 영화는 배리 앨런이 바꾼 운명이 히어로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돼버린 인과관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과거로 간 배리 앨런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린 배리 앨런 역시 번개를 맞고 초능력을 얻을 일이 없었다. 그리고 카라 조엘(사샤 칼레)을 구할 일도 없었다. 배리 앨런의 개입이 없었다면 그 곳은 히어로가 없는 세상이 되고 이는 조드 장군(마이클 섀넌)에 의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얻게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플래시다. 이는 히어로가 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비극적인 운명을 관객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배리 앨런은 다행히 운명을 받아들이고 합의점을 찾는다. 

마일즈 모랄레스는 그웬 스테이시(헤일리 스테인필드) 덕분에 멀티버스의 스파이더맨들이 모인 곳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마일즈는 스파이더맨이 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사건을 마주한다. 이 사건은 모든 멀티버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며 스파이더맨이 탄생돼야 하는 필연적 운명과 통한다. 멀티버스의 리더 스파이더맨인 미겔 오하라(오스카 아이삭)는 이런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마일즈에게 '강요'한다. 그러나 마일즈는 이런 운명을 거부하고 탈주한다. 미겔은 처음부터 마일즈가 자신들과 다른 운명을 타고난 스파이더맨이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온전히 완결되진 않았지만, 관객은 결국에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스파이더맨을 마주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운명 그 자체가 빌런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동안 숱한 영화와 애니메이션, 게임으로 접했던 스파이더맨의 서사와 다른 이야기다.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은 이전과 다른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스파이더맨의 서사가 될 것이며 멀티버스라는 배경은 여기에 정당성을 부여할 것이다. 

두 영화는 운명을 거스르는 행동에 대해 그것이 정당한가를 두고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보수적인 운명론을 제시하는 '플래시'와 "운명은 애초에 쓰여져있지 않다"라는 '스파이더맨'의 운명론. 사실 후자의 운명론은 '운명'이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하고 멀티버스 개념마저 거스른다. 필연적 사건을 거부한다면 영화에서의 설명대로 그의 유니버스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된다(어쩌면 운명을 거부하는 게 마일즈의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다른 운명론은 삶의 태도를 다른 방식으로 갖게 한다. 예를 들어 과거의 잘못이나 수치스러운 일에 대해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바꿀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만약 과거의 사건을 바꾸게 된다면 원인과 결과가 다르게 쓰여지면서 현재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일어난 일을 일어난대로 받아들이는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을 일어나지 않도록 바꿀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멀티버스'는 작가들이 이야기를 편리하게 쓰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설령 다른 세상이 있다고 한들 초능력이 없다면 갈수도, 볼수도 없는 세상이다. 다만 삶에서의 수많은 인과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후회하지 않으며 사는 방법 정도는 고민할 수 있다. 이것은 초능력이 없는 소시민이 고민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시간여행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