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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 위대한 영화음악가의 '서사'

불닭국밥 2023. 5. 30. 15:04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를 좋아한다. 촌스러운 서부영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르영화로서 짜임새는 영화 역사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완벽한 작품이다. 그저 잘 만들어서, 재미있어서 좋아하는 영화지만, 이 영화를 볼 때면 나는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나는 딱히 서부영화에 추억이 있는 나이도 아니고 영화 자체가 서정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서부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울컥한다. 열정적인 씨네필이던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기에도 적절한 영화는 아니다. 영화를 향한 열정이 불타던 시절에는 오히려 공포영화나 형사버디무비를 더 좋아했다. 50년도 더 된 서부영화를 보고 울컥하는 것은 적절한 지점이 존재하지 않고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는 하모니카 독주가 인상적인 'Harmonica'로 시작한다. 긴장감 넘치면서 외로운 소리가 서부극의 분위기를 대변해준다. 그러나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인 테마곡은 서정적인 멜로디와 함께 소프라노의 하울링이 지배하는 이 곡은 서부극의 고독한 영웅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엔딩에 이르면 이 메인 테마곡은 영화 전체를 장엄한 서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만든다. 서부 개척 시대의 고독한 영웅담을 잊혀진 역사의 한 페이지로 만들며 이야기의 가치를 높이게 한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훌륭한 연출과 찰스 브론슨, 헨리 폰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명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영화의 가치를 상승시킨 데는 영화의 음악을 맡은 엔니오 모리꼬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이런 엔니오 모리꼬네의 삶과 음악을 진지하게 쫓아가는 영화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지난해 도쿄국제영화제 라인업을 살펴보면서부터다. 부산국제영화제 직후인 10월에 열린 도쿄국제영화제의 라인업을 살펴보던 중 엔니오 모리꼬네의 다큐멘터리가 있다는 소식은 내 눈을 번뜩이게 하기 충분했다. 더군다나 이 다큐멘터리의 연출을 '시네마천국'의 쥬세페 토르나토레가 맡았다는 것은 프로그램 노트 그 자체로도 낭만이 넘칠 지경이었다. 이 영화 한편 때문에 진지하게 도쿄행 비행기 티켓을 끊을까 고민했지만, 1인치 자막의 한계 때문에 결국 포기했다. 영화사 진진이 이 영화를 수입하고 전주국제영화제가 이 영화를 상영한 것은 그 자체로도 대단히 감사한 일이었다. 영화의 제작에 참여한 왕가위 감독과 일본, 벨기에, 이탈리아의 모든 제작사, 투자에 참여한 명품 브랜드 불가리까지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이 영화는 꽤 저돌적이다. 150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엔니오 모리꼬네의 삶을 탄생부터 되짚어간다. 그는 처음부터 음악을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음악을 전공하게 됐다. 마치 가업을 물려받듯이 트럼펫 연주로 시작했지만, 작곡에 소질이 있어보인다는 교수의 권유로 작곡을 배우게 됐으며 이게 엔니오 모리꼬네의 시작이다. 이어 그는 젊었을 때 실험음악을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대중음악계에서 촉망받는 작곡가가 된다. 영화음악을 시작하고 시칠리 마피아 영화나 이탈리아 상업영화의 음악을 도맡았던 그는 친구인 세르지오 레오네와 함께 할리우드로 건너가 서부영화의 음악을 하게 되고 이어 우리가 알고 있는 서정적인 영화음악을 만들게 된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음악가인 엔니오 모리꼬네에 대해 내가 알고 있었던 사실이 빙산의 일각 수준이라는 걸 깨닫게 한다. 이것은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이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에는 놀라운 사실이 몇 개 등장한다. 먼저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존 케이지라는 사실이다. 20세기 초에 태어난 존 케이지는 우연성 음악의 개척자로 '4분 33초'가 가장 잘 알려진 곡이다. 이 곡은 말 그대로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음악이다. 대단히 실험적인 음악가였던 존 케이지는 일반적인 '악기'가 아닌 온갖 소리로 음악을 만들어낸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여기서 영감을 받아 동기들과 함께 온갖 소리를 활용한 실험음악을 만든다. 이는 그가 이탈리아 주류 음악시장에 입성하고 대중음악을 만드는 데 근간이 된다. 당시로써는 일반적이었던 대중음악의 공식을 깨고 온갖 실험적인 소리와 구성을 접목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데뷔하자마자 촉망받는 작곡가가 된다. 

여지껏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을 들으면서 실험적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현대에는 다양한 영화음악가들이 있고 그들은 익숙한 범위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다. 예를 들어 젊은 영화음악가인 브라이언 타일러는 드럼 비트를 베이스로 클래식 관현악을 더해 웅장하고 박진감 넘치는 느낌을 준다. 그 덕분에 '아이언맨3'이나 '분노의 질주' 시리즈, F1 시그널 음악 등을 작곡했다. 알렉상드르 데스플라는 관현악이 중심이 된 영화음악에서 벗어나 다양한 악기로 작품에 걸맞는 음악을 만들어낸다. 그의 별명은 '제2의 엔니오 모리꼬네'다. 크리스토퍼 놀란과 작업하는 한스 짐머는 때로 인생 최대의 시험에 부딪힌다. 다행스럽게도 그 결과물은 영화의 완성도를 살려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음악의 종류는 영화음악가의 숫자만큼 다양하다. 그토록 다양한 영화음악의 완성이 엔니오 모리꼬네였으며 영화음악이 하나의 장르가 된 것도 그의 성과 덕분이다. 

엔니오 모리꼬네 이전이나 그와 동시대에도 영화음악가는 있었다.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활동한 헨리 만치니나 10년도 더 이전의 영화음악가인 버나드 허먼이 대표적이다. 헨리 만치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제곡 'Moon River'와 '술과 장미의 나날들'의 'Days of wine and roses'를 만들어 2년 연속 오스카 음악상을 거머쥐었다. 버나드 허먼은 저 유명한 '시민 케인'부터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현기증', '싸이코', '새' 등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과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 등에 참여했다(버나드 허먼은 엔니오 모리꼬네보다 17년 일찍 태어났지만, 활동 시기가 비슷한 만큼 동시대의 영화음악가로 봐도 무방하다. 버나드 허먼이 히치콕 영화의 음악을 만들 때 엔니오 모리꼬네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극 음악을 만들고 있었다).

버나드 허먼과 엔니오 모리꼬네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버나드 허먼과 주로 작업한 알프레드 히치콕은 엄청난 자의식을 가진 사람이다. 배우를 활용하는 데 있어 배우의 의견보다 자신의 생각을 절대적으로 중요시한다. 영화 전체를 온전히 감독의 책임 하에 두며 배우와 모든 스탭을 그 수단으로 활용한다. 좋게 말하면 리더십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고집불통이다. 배우에게 강요를 요구하던 사람이 영화음악가에게 아량을 베풀리가 없다. 버나드 허먼이 작업한 히치콕의 영화음악 중 기억에 남는 곡도 분명 있다(예를 들어 '싸이코'의 'Prelude'). 그러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에서 음악을 더 각별하게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반면 엔니오 모리꼬네는 워낙 다작을 했던 탓에 어떤 경우에는 음악이 더 각별하게 기억되기도 한다(다만 그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나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화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영화음악이 영화를 삼켜버리는 경우는 아주 가끔 생긴다. 예를 들어 '미션'의 음악은 들어보면 누구나 다 알지만, '미션' 영화 자체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이 올바른 결과인지, 아닌지는 의견이 갈라질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엔니오 모리꼬네가 참여한 영화는 높은 확률로 영화와 음악이 상호보완적이다. 히치콕이나 버나드 허먼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히치콕의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미장센과 촬영, 편집 덕분에 훌륭한 영화들이 나왔다. 영화의 모든 요소들은 히치콕의 큰 그림 안에서 저마다 역할을 했다. 이는 엔니오 모리꼬네가 참여한 영화들과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엔니오 모리꼬네는 수백편의 영화를 작업하면서 '꼬장꼬장한 거장'들을 만난 적이 없다. 그는 파졸리니도 설득시켰고 세르지오 레오네는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서 '꼬장꼬장한 거장'과 만날 일이 단 한 번 있었다. 엔니오 모리꼬네가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영화 음악을 맡으며 전성기를 달리던 1960년대 후반, 스탠리 큐브릭은 엔니오 모리꼬네와 작업하고 싶다는 제안을 한다. 엔니오 모리꼬네도 당시 거장이었던 그와 작업을 할 생각이 있었지만, 절친인 세르지오 레오네는 큐브릭에게 "엔니오는 바쁘다"라며 대신 거절한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인터뷰에서 "그때 난 바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엔니오 모리꼬네와 스탠리 큐브릭의 만남은 그 이름값만으로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큐브릭의 영화에서 음악이 기억나는 경우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요한 스트라우스 곡이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엔딩곡 정도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고집이 큐브릭의 고집과 만나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전주국제영화제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 영화음악가 조영욱은 두 사람의 만남이 그리 긍정적인 결과는 아니었을 거라고 예상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에는 몇 번의 변화와 굴곡이 있었다. 마치 삶과 커리어가 파도처럼,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처럼 극적인 감동을 준다. 삶과 필모그라피만으로 장엄한 서사가 되는 경지는 이른다. 세계 영화역사에서 어느 누가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이런 서사가 있어서 지루하지 않다. 무엇보다 시대를 앞서간 음악들을 시작으로 익숙한 음악들이 나오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화려한 인터뷰이도 나온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 156분은 위대한 영화음악가의 인생과 커리어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관객이 엔니오 모리꼬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던, 이 영화는 그 이상의 엔니오 모리꼬네를 보여준다. 고집스러우면서 재능있는 천재적인 음악가를 추억하기에 아주 훌륭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