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작 영화 '그날 이후(The Day After)'는 어린 나에게는 꽤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미국 ABC 방송국에서 제작한 TV영화인 '그날 이후'는 핵폭탄의 공포를 사실감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특히 핵폭탄이 터지고 도시가 초토화되는 장면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그날 이후' 이후에 많은 영화들이 핵폭발 장면을 표현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폭발은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됐지만, '그날 이후'보다 자세하게 표현한 영화는 아직 없었다(핵폭발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터미네이터2'조차 '그날 이후'에 빚을 지고 있는 수준이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핵폭발에 노출된 사람이 증발해버리는 장면이다. 강한 빛과 열기에 노출된 사람들은 불타버리는 것을 넘어 '증발'해버리고 그 흔적만 남는다. 핵폭탄에 대해 무지했던 어린 나는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이 영화를 보고 사람이 증발해버리는 지점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이후'에서 40년이 지나고 2023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가부키초의 탐정 마리코'(마리코)를 봤다. 바구니 속에 든 외계인이 인간을 공격한다. 공격당한 인간은 벽에 흔적만 남은 채 '증발'해버렸다. 딱 40년전 '그날 이후'가 떠오르는 장면이다(특수효과도 '그날 이후'가 생각날 지경이다. 40년전 영화다).
'마리코'는 신주쿠에서 작은 바를 운영하는 마리코(이토 사이리)가 주인공이다. 마리코는 어느날 FBI로부터 사건을 의뢰받는다. 사건은 일본에 불시착한 외계인을 빼돌린 자위대 소속 박사를 찾아달라는 것이다. 외계인은 연구를 위해 미국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정통 탐정물처럼 시작하지만, 이 영화는 사건을 해결하는데 관심이 없다. 마리코의 바는 신주쿠의 여러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영화는 외계인을 찾는 사건 대신 신주쿠에 머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치 '심야식당'이 떠오르는 전개다. 마리코의 주변인들은 다들 독특하다. 남자친구 마사야(타케노우치 유타카)는 가업을 계승받았다. 그 가업은 '닌자'다. 거리에서 '닌자술'을 가르치지만, 현재의 일본 젊은이들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야쿠자부터 킬러, 사무라이 영화에 오열하는 영화감독 지망생, 호스트바에 전재산을 밀어넣은 젊은 여성까지 등장한다. 이들은 마치 신주쿠의 잊혀진 기억처럼 거리에서 여전히 이야기를 만든다. 실제로 현재의 젊은이라면 억지로라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 같은 업종의 사람들이다. 영화는 이런 사람들을 꾸준히 등장시키면서 신주쿠의 뒷골목을 배회한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핵폭발을 연상시키는 외계인의 공격이 등장했다.
마리코는 꾸준히 외계인을 쫓고 있다. FBI는 마리코에게 외계인을 추적할 방법으로 가이거 계수기를 건넨다. 외계인이 내뿜는 높은 방사능을 쫓아가라는 것이다. 애초에 이 외계인은 핵폭탄부터 시작해 방사능 유출까지 상징한다. 일본의 과거와 유령처럼 배회하는 신주쿠의 현재에서 방사능 덩어리가 숨어다니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마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부터 후쿠시마 원전사고까지 압축한 것 같다. 일상을 파괴하는 낯선 위협을 이 영화는 '외계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외계인은 영화에서 마치 'E.T'처럼 묘사된다. 주인공의 일행과 박사에게는 친구와 같고 FBI와 야쿠자에게는 쫓아야 할 대상이 된다(FBI는 외계인을 미국으로 데려가려 하고 야쿠자는 중국에 팔아버리려고 한다). 영화는 이 위력적인 방사능 덩어리를 국제정세에 휘둘리게 내버려두고 있다. 이를 지키려는 주인공 일행의 힘은 너무 미약하다. 결국 방사능 덩어리는 스스로를 구해낸다. 신주쿠 한복판에 UFO가 등장하는 엄청난 장면을 보여주며 영화는 결말로 향해간다. 가이거 계수기로 측정할 수 있는 수준의 방사능을 내뿜고 몇 명의 사람들을 증발시켜버린 외계인이지만, 영화 속 누구도 이 외계인을 위협으로 대하진 않는다.
방사능 덩어리를 쫓는 인물들은 그 자체로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아이러니다. 영화는 이런 아이러니가 가득하다. 사랑하기에 함께 죽어버리려는 남녀, 화려한 호스트의 삶을 살지만 한계에 갇혀버린 남자, 어린 딸에게 살해당한 야쿠자, 에어로빅을 겸업하는 닌자, 사랑하기에 남자를 공유하는 자매, AV를 찍는 딸과 매직미러에서 마주한 아버지. 무엇보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자폭탄을 맞았던 나라가 원자력 발전을 하다 방사능이 유출된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일 것이다. 엉뚱하고 이상한 영화인 '마리코'는 이런 아이러니 그 자체다. 그리고 유쾌할 것 같았던 시작과 달리 영화는 가면 갈수록 어둡고 기이하다. 특히 사건을 해결하고 해피엔딩을 맞은 것처럼 보이지만, 일부 인물들은 새드엔딩을 맞이한다. 앞서 이 영화를 '심야식당'이 비유했다.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깊은 밤의 식사는 여기에 없다. 그리고 행복한 결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은 디스토피아 시대의 심야식당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 우울에 잠겨 지하로 침잠하는 곳. ...하긴, 방사능이 배회하는 거리(혹은 국가)에서 감히 행복을 바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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