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지도 12년이 지났다. 이 정도 지난 일이라면 슬슬 역사책으로 돌아가야 할테지만, 일본은 아직 그러지 못한 분위기다. 지진의 후폭풍과 같았던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여전히 세계의 골칫거리다. 일본은 앞으로도 수십년동안 이 원전사고를 수습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동일본 대지진이 가져간 훈장과 같다. 일본이, 그리고 세계가 동일본 대지진을 현재진행형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동일본 대지진에 관한 인상은 강하게 남아있다. 산술적으로 따져본다면, 지진이 일어났던 2011년에 10대 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2023년 현재 20대가 됐다. 아마도 그들에게 일본사회는 저성장과 초고령화, 지진의 여파를 떠안은 우울한 모습일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미 아포칼립스를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나이의 많고 적음이 있을까 싶지만, 더 어리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에게 재난의 상처는 더 깊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런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사회의 주요 청년층이 됐다. 우리나라의 문제기도 한 저출산과 초고령화의 원인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확실한 것은 사회에서 희망을 찾기 어렵다면 아이들 낳으려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청년을 도구화하는 사회 시스템과 기성세대의 인식은 저출산과 초고령화라는 징벌로 찾아왔다. 대지진과 원전사고의 절망과 전쟁지향적인 기성세대의 인식은 일본 청년들에게 절망을 안겨줬고 이는 아이를 낳지 않는 사회를 만들었다. 이런 세상에서 이야기꾼들은 청년들의 절망을 보듬으려 한다. 이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최근까지 사람들에게 들려지고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에서는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바쿠)과 안정된 현재(료헤이)라는 두 가지 희망이 찾아온다. 아사코(카라타 에리카)는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와 행복하고 특별했던 시절을 보냈지만, 바쿠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뜬구름같은 바쿠와 달리 료헤이는 현실을 인식하고 적응하며 이겨내려고 한다. 료헤이와 안정된 미래를 준비하려던 아사코는 바쿠가 다시 나타나자 주저없이 료헤이 곁을 떠난다. 그러나 바쿠와 재회하고 떠난 자리에는 과거의 행복과 즐거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사코는 다시 료헤이 곁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료헤이는 당연히 아사코를 매몰차게 밀어낸다. 꾸역꾸역 다시 만난 두 사람의 표정은 밝지 않다. 그러나 결국 함께할 수밖에 없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서로에게 어떻게든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존재기 때문이다.
영화 '아사코'에는 지진 장면이 한번 등장한다. 또 료헤이는 후쿠시마가 포함된 토호쿠 지역 재건 축제에 아사코와 함께 간다. 이 영화에는 센다이 해변도 한 차례 등장한다. '아사코'는 동일본 대지진을 읽을 지점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를 떠올리게 하는 정통 멜로영화다. 나루세 미키오의 어떤 영화에서 가장 사적인 관계는 시대에 의해 비극을 맞이해야 했다. '아사코'의 관계는 온전히 시대에 책임을 돌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건들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아사코 앞에 나타난다. 영화의 제목이 노골적으로 주인공의 이름을 따라가는 것은 이 영화의 화자가 사실상 아사코임을 의미한다. 바쿠와 료헤이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아사코의 얼굴은 쉽게 읽어내기 힘들다. 그것은 불안한 시대에 혼란스러워하는 청춘들의 모습일 것이다. 누구도 길을 제대로 끌어주지 못하는 시대에서 청춘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을 꾸역꾸역 이겨낸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이 같은 시선은 '아사코'를 지나 '드라이브 마이 카'로도 이어진다. 히로시마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을 통째로 가로지르는 이 영화는 어머니를 부정하고 아버지는 부재하다. 그렇게 길 잃은 청춘은 기성세대의 유산을 물려받은 채 이웃나라로 떠났다. 청춘의 희망이 다른 나라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아사코'의 청춘은 더러운 물이 흐르는 강을 바라본다. 그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은 기성세대가 쌓아놓은 유산일 것이다. 청춘들은 '저성장'과 '대지진'이라는 사회의 유산을 물려받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제로'에서 시작하기를 원한다.
신카이 마코토는 어느날 갑자기 판타지 장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을 내놨다. 이 3부작은 각각 혜성충돌, 홍수, 지진이라는 재난을 다루고 있다. 제각기 다른 재난이지만, 이것은 모두 한가지로 통한다. 3부작의 마지막인 '스즈메의 문단속'이 노골적으로 2011년 3월 11일을 가리키는 것은 재난 판타지 3부작의 결론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신카이 마코토의 세 작품은 모두 10, 20대가 주인공이다. 신카이 마코토 애니메이션의 주 소비층이 10, 20대인 만큼 당연한 선택이겠지만, 여기에는 지진의 상흔을 안고 성장한 세대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재난을 마주한 아이들은 각자의 능력으로 재난을 극복하려고 한다. 거대한 적을 막을 힘이 아이들에게 있다는 것은 판타지 장르에서 당연한 선택이다. 그러나 꽤나 현실적인 적(재난)을 마주하고 싸울 힘이 아이들에게 있다는 것은 때로 좀 가혹하게 느껴질 수 있다. 신카이 마코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무나타카(마츠무라 호쿠토)는 교사가 되기 위한 시험을 준비하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어느날 조상의 대를 이은 업(業)을 물려받은 뒤 시험도 못 치르게 되고 문단속을 하러 다닌다. 그러다가 의자가 되는 일까지 겪는다. 과거의 업 때문에 자신의 현재를 보장받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는 스즈메(하라 나노카)도 마찬가지다. 그저 뭔가를 봤다는 이유로 친구와 가족의 곁을 떠나 힘든 여행길에 오른다. 스즈메의 모험은 주로 일상 속 공간에 머무른다. 멀쩡한 사람이 의자가 되고 말하는 고양이가 시비를 걸지만, 이세계로 떠나거나 하는 짓은 저지르지 않는다. '재난'이 빌런인 만큼 일상 속 공간에 머무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유난히 로드무비처럼 지진을 쫓아가며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각자 현재를 살면서 과거를 기억한다.
이 영화에서 문을 닫기 위해 공간에 머물렀던 사람들을 떠올리는 일도 특별하다.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들에서는 10, 20대에게 막중한 짐을 떠넘기면서 과거의 유산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치 기성세대의 유산이 아이들을 지켜줄 것처럼 말한다. 세리자와(카미키 류노스케)가 즐겨듣던 옛날 노래들은 이런 메시지를 주는 여러 단서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지진 이후 세대가 갖는 절망과 상실감에 초점을 맞췄다면 신카이 마코토는 절망과 상실감 이후를 바라본다. 전자가 현실적인 시선이라면 후자는 이상적인 시선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들은 '판타지' 장르다. 절망이 가득한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판타지스러운 시선도 조금 필요할 수 있다.
이와이 슌지의 시선은 조금 특별하다. 그는 동일본 대지진에 대해 유난히 말을 아꼈던 사람이다. 그의 다큐멘터리 '3.11 이와이 슌지의 친구들'은 탈원전에 대한 노골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후 '립반윙클의 신부'에서는 현실세계에서 단절돼버린 청춘들의 모습을 담고 있으나 지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지진이 전면에 등장한 극영화는 '키리에의 노래'가 처음이다. 이와이 슌지가 이야기하는 동일본 대지진은 특별하다. 그는 실제로 후쿠시마와 인접한 센다이 출신이며 원전사고로 그의 고향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동일본 대지진의 훈장이라면 센다이시 역시 그 훈장의 영향 아래 있는 셈이다. 지진에 대해 다른 작가들보다 조금 더 각별할 수 있는 이와이 슌지가 이야기는 동일본 대지진은 노래에서 시작된다.
'키리에의 노래'의 주인공 키리에(아이나 디 엔드)는 어릴 때 쓰나미로 가족을 잃었다. 언니의 약혼남을 찾아 오사카까지 온 어린 키리에는 떠돌이 생활을 하며 노래를 배우게 된다. 어른이 되고 버스킹을 하던 키리에는 우연히 고등학교 시절 친구 잇코(히로세 스즈)와 만나게 되고 매니저와 가수의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잇코의 과거 때문에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언니의 약혼남 나츠히코(마츠무라 호쿠토)와도 재회한다. 영화의 화자는 키리에다. 영화는 키리에의 시선으로 그녀가 가수로 자리잡는 과정과 주변인물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담아낸다. 마치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처럼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얽히면서 일본 사회의 모습을 담는다. 여기에는 플래시백이 주로 사용되면서 시간과 장소를 일본의 여러 곳으로 흐트러뜨린다. 시선을 분산시키는 인상을 받지만, 이는 모두 동일본 대지진으로 만난다. 지진의 상흔을 떠안은 청춘들은 행복을 찾을 권리를 잃고 오랫동안 방황한다. 방황은 대지진의 여파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키리에의 노래'는 스타일면에서도 이와이 슌지의 이전 영화들과 다르다. 광각렌즈의 사용이 잦아졌고 시선 역시 사람의 위치에 머물지 않는다. 카메라는 하늘을 떠다니거나 땅을 기어다니면서 공간을 왜곡시킨다. 이와이 슌지의 오랜 팬들은 그를 두 부류로 나눈다. 소위 '화이트 이와이'라 불리는 스타일에는 '러브레터'나 '4월의 이야기', '하나와 앨리스' 등 청춘 멜로영화들이 포함돼있다. 그리고 '다크 이와이'라 불리는 스타일에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피크닉' 등 어둡고 기이한 영화들이 포함돼있다. '키리에의 노래'에 대해 분류를 나누자면 '다크 이와이'에 가깝다. '다크 이와이' 스타일에서는 간혹 카메라의 왜곡이 일어난다. 대표적으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혼란스러운 시선의 카메라는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다. '피크닉'의 만화적인 시선도 당시로서는 최선의 왜곡이었다.
'키리에의 노래'에 등장하는 시선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카메라는 사람이 대상을 볼 수 있는 위치를 벗어나려고 한다. 렌즈조차도 사람의 시선과 달리 공간을 왜곡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감독은 이 이야기가 비현실적이기를 바라고 있다. 아이가 집을 잃고 길을 헤매며 기댈 곳 없이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는 그저 영화 안에 머무르길 바란다. 마치 하마구치 류스케의 현실을 신카이 마코토의 판타지로 바라보는 느낌이다. 현실은 참혹하지만, 행복했던 기억을 품고 새로운 행복을 찾으라는 메시지는 엔딩크레딧씬에서 보여진다. 키리에에게 기성세대가 바라는 방식은 더 나은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소공녀'의 미래(이솜)처럼 자신만의 방식으로 행복을 찾아간다. 길 위를 떠도는 희망에게 그대로 떠돌기를 바라는 기성세대의 메시지에는 유산을 계승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은 '키리에'는 가톨릭에서는 하나님의 자비를 간정하는 미사곡과 일본의 전통 종이공예를 지칭하는 말이다. 과거의 유산과 이상을 쫓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절망의 시대를 지나 행복을 찾으려 한다. 그 노래는 '키리에'가 될 것이고 그 목소리는 '키리에'가 될 것이다. 영화 '키리에의 노래'는 이와이 슌지의 어두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따뜻하다. 눈밭에 누운 두 소녀의 모습은 따뜻함을 담은 훈장처럼 보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자연재해에 대한 영화를 만들지는 않는다.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엄청난 재난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재난 못지 않은 사건사고가 빈번한 이유도 있다. 성수대교 붕괴를 기억하는 '벌새'나 삼풍백화점 붕괴를 담은 '가을로', 세월호 참사를 담은 '생일' 등은 재난만큼 처참했던 '사건'을 담은 영화다. 우리 영화가 사건과 그에 관련된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 방식은 대단히 조심스럽다. 이는 사건이라는 것의 특징이 작용한다(누군가는 사건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믿는다). 한국영화에서도 사건을 조명하고 이해하려는 의도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사건을 겪은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데는 많이 조심스럽다.
'사건'이란 수십수백명이 목숨을 잃은 순간으로 기억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랫동안 어떤 행위를 하는 데 영향을 주는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뉴스를 기억한다. 하굣길 버스 라디오에서 들었다 '다리가 붕괴되었습니다'라는 뉴스를 듣고 이해하지 못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헤드라인을 보며 안심했다가 얼마 뒤 오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절망감을 기억한다. 물이 밀려 들어오는 도로의 모습을 담은 블랙박스 영상을 봤을 때 공포를 기억한다. 사건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그것은 트라우마를 남기게 된다. 당연히 어른보다 아이들이 겪는 트라우마가 더 크다. 누군가는 그 트라우마를 보듬어 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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