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를 좋아한다. 이것은 사내 둘이 대결하는 이야기지만, 관객은 한쪽 편을 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복싱경기의 특징이 그렇다. 두 사람이 피 터지도록 싸우지만, 거기에는 선악구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규칙에 의해 싸우고 승패를 정할 뿐이다. 단순한 듯한 이야기에 진정성을 불어넣으니 영화는 어느 장면, 어느 캐릭터 하나 버릴 게 없는 수준이 돼버린다. 위와 같은 이유로 '주먹이 운다'는 '남자들의 끝장 대결'을 다룬 영화 중 독특한 포지션이다. 대부분 남자들의 끝장대결을 다룬 영화에는 선악구도가 존재한다. 관객은 당연히 선한 자(혹은 조금 덜 악한 자)의 편에 서서 정의가 구현되는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여기에 강한 것들 끼리 맞붙는 데서 오는 타격감도 즐겁다. 가장 대표적으로 '공공의 적'이나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해당된다('범죄도시'도 카타르시스가 넘치는 영화지만, 힘의 균형이 안 맞다).
'서울의 봄'의 모티브가 된 12.12 군사 쿠데타는 남자들의 끝장승부와 무방한 사건이다. '하나회'라는 군대 사조직이 혼란스런 시기를 틈타 정권을 찬탈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를 전두광(황정민)과 이태신(정우성), 남자 대 남자의 끝장승부로 묘사한다. 이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과 장태완 장군을 모티브로 한 것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실제로 12.12 쿠데타 당시 전두환은 서울을 삼키려 했고 장태완은 이들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기울었던 싸움이 비등해질 수 있을까? 무엇보다 관객 대부분이 결과를 알고 있는 이 비극적인 사건에서, 관객은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까? 이미 극장가는 '남한산성'의 사례를 알고 있다. '남한산성'은 이미 내부시사 단계서부터 웰메이드 영화로 정평이 나 있었다. 흥행이 잘 될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지만, 같은 날 개봉한 '범죄도시'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이는 마동석의 막강함에 맥을 추리지 못한 탓도 있지만, '남한산성'이 다룬 사건 자체가 워낙 비극적인 만큼 관객을 끌어오기 쉽지 않은 탓도 있다. '서울의 봄'은 이 숙제를 극복했을까?
'서울의 봄'은 복잡하고 긴박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이 영화의 핵심인물은 전두광과 이태신 2명이다. 나머지 인물들은 유능한 조력자거나 무능한 장군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의 캐릭터는 꽤 상반돼있다. 전두광은 언변이 뛰어나고 카리스마가 있다. 리더십을 갖추고 있고 과감한 결단을 내릴 줄 안다. 그의 곁에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결성한다. 리더로서 전두광은 훌륭한 인물이지만, 그는 '그릇된 권력욕'을 품고 있다. 이는 자신의 직책에서 해야 할 본연의 임무를 져버린 일이다. 반면 이태신은 군인으로서 본분에 충실하고 올곶은 인물이다. 자신의 사람을 챙길 줄 알지만, 리더로서 판단이 빠른 편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권력욕이 없다. 두 사람의 대결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힘이 있지만, 그릇된 목적을 가진 리더'와 '힘이 없지만, 정의로운 리더'의 싸움이다. 이는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과 같다. 관객은 이 대결의 결과를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어떤 리더를 따를 것인가"라고 묻는다. 전두광을 따르면 목숨을 건지고 권력을 얻을 수 있지만, 역사의 죄인이 된다. 이태신을 따르면 정의로운 목적에 함께 할 수 있으나 패자가 된다. 이 질문은 의외로 쉽지 않다.
영화는 전두광과 이태신의 라이벌 관계에 대해 빈 공간을 많이 둔다. 그래서 오히려 두 사람이 라이벌이었는지도 헷갈리게 한다. 영화 내내 전두광은 이태신을 신경쓴다. 영화 초반에 전두광은 이태신을 자신의 목적에 동참시키려고 했고 그것이 실패하자 이태신을 잡으려고 했다. 두 사람의 대결구도로 영화가 형성된 만큼 전두광의 목표는 권력을 얻음과 동시에 이태신을 이기는 것이다. 두 사람이 마주보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암시한다. 철조망을 뚫고 기어이 전두광을 마주한 이태신은 두 눈을 부릅뜨고 험담을 한다. 전두광이 기어이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이태신의 의지는 꺾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전두광은 승리의 기쁨에 온전히 취하지도 못한다. 그가 어두운 화장실에서 홀로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괴성을 내지르는 장면은 모든 것에서 승리했음에도 단 한 가지에서 패배한 자의 묘한 감정을 드러낸다. 이 결말만으로 관객은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전두광, 아니 전두환은 승리한 자의 삶을 살았을까?
생각의 차이가 있겠지만, 전두환이 승리의 영광을 온전히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부정한 자로 재판에 서며 역사에 남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독재자', '학살범'으로 규정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후에 등장할 80년대의 암흑기와 피로 쓰여진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알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전두광과 그 조직들이 누리는 승리의 영광에 관객들은 분노할 것이다. 존경받지 못하는 승자의 삶을 바라보며, 그것이 온전한 영광이었는지 되묻게 된다.
실제 전두환과 장태완의 관계도 꽤 묘하다. 처음부터 장태완은 자신보다 5년 아래 후배인 전두환이 빠르게 승진한 것에 불편함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 전두환이 장태완을 영입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 당시 장태완 장군을 한국증권전산(現 한국거래소) 회장으로 꽂은 걸 보면 끝내 자신의 사람으로 품고 싶었던 모양이다. 장태완은 12.12 쿠데타 이후 한국증권전산, 르메이에르 회장 등을 역임했고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패자의 삶 치고는 평안했다 생각할 수 있지만, 군사쿠데타 이후 옥고를 치르는 동안 아버지가 사망했고 이후 아들 역시 할아버지의 무덤 옆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리고 장태완 장군의 아내 이병호 여사도 2012년 자택 인근 화단에서 사망했다. 당시 집 안에서는 유서가 발견됐다고 한다.
이후 장태완 장군은 스스로를 "12·12 반란을 막지 못한 국민의 죄인이자 가족 3대를 망친 가문의 죄인"이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차라리 죽는 것이 떳떳하고 마음 편한 일이지만 "12·12 쿠데타의 진상을 역사와 국민 앞에 증언할 마지막 임무 하나만 마치고 이승을 하직하겠다는 일념으로 구차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엄청난 시련 속에서 그는 심장병을 얻어 불편한 몸으로 "요즘 12·12쿠데타 주역들을 법정에 세우려는 고소장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시사저널 2006. 5. 16자 "오직 진상 밝히려 살아왔다". 본문 발췌).
전두환은 끝내 장태완을 이겼을까? '서울의 봄'은 그 사실에 대해 또 질문을 던진다. 승자는 모든 영광을 누렸지만, 끝내 패자의 의지를 꺾진 못했다. 이 사실은 우리 근현대사의 거의 모든 사건에 해당된다. 예를 들어 일제가 조선을 함락하고 조선인들을 굴복시키려 했지만, 끝내 독립운동가들의 의지를 꺾지 못한 경우다. 이때도 우리는 "친일파가 돼 편안하게 살 것인가, 독립운동가가 돼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 싸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서울의 봄'이 던지는 질문은 역사를 바라보는 모두에게 던지는 것과 같다.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은 그렇게 가깝다. '전두광을 따를 것인가, 이태신을 따를 것인가'를 묻는 영화의 질문은 선과 악이 그만큼 가까이에 있음을 보여준다.
처음 12.12 쿠데타를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이미 대중매체가 많이 우려낸 사건이고 무엇보다 민주화운동 세대가 2030 유권자들에게 큰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12.12 쿠데타를 영화화해서 뭘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우선 '서울의 봄'은 이 사건을 두 남자의 대결로 만들어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었다. 결말을 알고 보는 싸움이지만, 보는 내내 긴장감 넘치는 연출이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선과 악의 경계를 묻는 질문은 현재진행형으로 관객에게 던져진다. 또 리더로서 다른 형태로 역량이 뛰어난 두 사람을 보면서 관객의 선택을 묻기도 한다. 무엇보다 현 정부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인 '카르텔'에 대해서도 알기 쉽게 설명한다('하나회'야말로 진정한 '카르텔'이다).
'서울의 봄'은 분명 현재에 필요한 이야기를 던졌고 필요한 만큼의 재미를 주고 있다. 이제 필요한 만큼 흥행을 하는지가 관건이다. 긍정적인 점이라면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막강한 두 사람이 충돌하는데서 오는 타격감, 곳곳에 숨어있는 유머 등이다. 부정적인 요소라면 결과를 다 아는 비극적인 사건이라는 점과 대중문화 주 소비층인 2030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지 못하는 민주화운동 세대의 등장 배경을 다룬다는 점이다. 부정적인 요소에 대해 변명하자면 비극적인 사건을 감독이 어떻게 재해석했는지, 40여년전 역사가 어떻게 현재진행형이 될 수 있는지 알아보면서 영화를 보면 좋다. 첨언하자면 이 영화와 함께 장준환 감독의 '1987'을 보는 것도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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