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인간의 생애주기로 봤을 때 나는 아직 죽음을 걱정할 나이는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나보다는 죽음에 조금 더 가까워진 나이기는 하다. 주변 사람들이 결혼하던 시기를 지나 돌잔치를 하던 시기를 거치고 나면, 주변 사람들의 가족들이 세상을 떠나는 시기가 온다. 그 시기가 나면 친구와 형제가 세상을 떠나는 시기가 오게 된다. 아마 그때쯤,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약 그때가 온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할까? 죽음을 가까이 두지 않아서 그 생각에 감히 근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을 가까이 둔 노인의 생각을 읽어보면, 죽음이 삶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는 참 좋은 것 같다. 영화는 겪어보지 못한 삶을 감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2008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그랜 토리노'를 봤을 때, 그가 '더티 해리' 시절의 업보를 내려놓는 줄 알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는 '용서받지 못한 자'를 만든 시절부터 자신에게 씌워진 영웅담을 벗겨내고 있었다. 노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활발하게 영화를 만든다. 그 작품들 중 어떤 영화는 마치 자전적 이야기처럼 들린다.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에서 느낀 무거운 책임감과 '라스트 미션'에서의 업보,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의 외로움은 노년의 그가 느끼는 솔직한 감정들처럼 들린다. 모든 노년의 영화감독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영화감독이 노년에 내놓는 이야기는 그가 이룩한 영광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나 마틴 스코세이지의 '플라워 킬링 문',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는 우리가 사랑한 거장들의 자전적인 고백과 같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아주 노골적인 제목을 가졌다. 이 작품은 제목부터 이전과 다른 특징을 가진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를 거쳐 '벼랑 위의 포뇨'까지, 그의 작품 제목은 대부분 인물의 이름(별명)이나 지명에 대한 언급이 전면에 등장한다('붉은 돼지'의 주인공 이름 '포르코 로쏘'는 이탈리아어로 붉은 돼지를 뜻한다). 그가 은퇴작으로 내놨던 '바람이 분다'는 유일하게 지명이나 인물의 이름(별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이후 10년만에 내놓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도 인물나 지역의 이름이 제목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얼마나 더 작품을 만들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가 다음 작품을 내놔도 거기에는 인물이나 지역의 이름이 제목에 박히지는 않을 것이다. 특정 인물이나 지역이 제목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목의 보편성을 확보한다. '이 이야기는 특수한 공간이나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누구에게나 속할 수 있는 이야기다'라고 말하는 듯한 이 선언을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전적 이야기임을 확보하고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심을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생애를 아는 사람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의 이야기라고 믿는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군수공장을 경영하면서 제로센의 부품을 납품하기도 했다. 물론 1941년생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작품 속 마히토와 차이가 있다. 아마도 마히토는 어른의 시선으로 전쟁 당시의 일본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아일 것이다. 어린 본인과 현재의 본인 사이의 합의점.
자전적 배경으로 시작하지만, 이 영화는 엄연히 '이세계물'이다. 신비한 탑으로 향한 소년이 다른 세계로 떠나 새엄마를 구하는 게 주 내용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는 이세계물이 꽤 많다. 대체역사를 배경으로 하거나 신비한 존재가 등장하는가 하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아예 다른 세계로 가버리기도 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마히토는 다른 세계로 가서 새엄마 나츠코를 구해야 한다. 엄마도 아니고 하필 새엄마인 점이 독특하다. 게다가 나츠코는 마히토의 원래 엄마 히사코의 여동생, 즉 쇼이치의 처제다. 쇼이치는 처제를 아내로 들인 것이다. 마히토의 엄마는 병원 화재로 세상을 떠났다. 나츠코는 마히토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챙긴다. 그러나 마히토는 무뚝뚝하다. 그러다 갑자기 마히토가 나츠코를 구하러 떠난다. 마히토의 이세계 여행에서 가장 먼저 수긍해야 할 일은 나츠코에게 시큰둥했던 마히토가 왜 그녀를 구하려고 모험을 떠나냐는 것이다. 작중에 등장하는 근거는 "아빠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가 아빠를 믿고 따른다는 근거는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마히토의 이세계 모험에서는 다른 시간선에서 온 히사코도 등장한다. 그럼에도 마히토는 동요되지 않는다.
어린 아이에게 '엄마가 바뀐다'라는 것은 세계가 바뀌는 경험과 같다. 작중에서 아빠 쇼이치가 공장일로 바쁜 것을 보면 마히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엄마와 집안일을 도와주는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들을 제외한다면 마히토에게 '새로운 세계'가 돼야 할 사람은 나츠코다. 마히토가 이세계로 떠나는 모험은 자신에게 닥쳐올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는 마히토의 큰할아버지와 만나면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마히토의 큰할아버지는 이세계를 처음 발견하고 그곳으로 떠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세상을 마히토에게 물려주려고 한다. 마히토는 자신이 뜻하는 대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그곳에 군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살던 세상은 전쟁이 한창이고 불안이 팽배하지만, 그 세상의 일원이 돼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 과정이 재미있다. 아주 오래전 하늘에서 어떤 물체가 마을로 떨어졌고 마히토의 큰할아버지가 이를 발견해 여기에 탑을 지었다. 이 물체가 어디서 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진 것치고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분명 운석이 떨어진 흔적과는 다르게 그려졌다. 마치 뭔가가 폭발한 것처럼 그려졌다.
일본의 패전은 어떤 전기를 마련했다. 이는 국가 지도자들뿐 아니라 소시민들에게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그리는 시대는 원자폭탄이 터진 순간처럼 세상이 바뀌는 지점에 있다. 영화는 세상이 변화하는 시대에 '나는 이렇게 살았다'라고 말하면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묻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눈에 지금의 세상은 (적어도 일본사회는) 크게 요동치고 있는 모양이다. '세상이 요동치고 있다'는 말에는 격하게 공감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플라워 킬링 문'은 FBI의 전신이 된 법무부 수사국(BOI)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20년대 미국 오클라호마주에서 일어난 오세이지족 연쇄살인사건이 주된 이야기다. 영화는 일반적인 수사물의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대신 살인자들의 시선으로 오세이지족 사회에 스며들어 기회를 노리는 백인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긴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고 살인자들이 주인공인 만큼 살인자의 서사를 길게 보여준다. 현대 범죄장르 영화나 드라마에서 범죄자의 서사에 힘을 싣지 않는 것과는 대치된다. 그러나 이는 100년전 범죄사건이며 이것이 범죄에 대한 미화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범죄 그 자체에 대해 심도있게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긴 러닝타임 동안 어니스트와 킹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두 사람의 선악에 대해 헷갈리도록 만든다. 관객들은 이들이 악인이라는 걸 깨닫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왜냐하면 그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살인자의 악랄함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킹(로버트 드니로)은 살인의 배후에 있으면서 오세이지족 사회에 스며들어 그들에 대한 살인을 규탄하기까지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정작 살인장면은 무덤덤하게 그려진다. 이는 이 영화에서 범죄자나 범죄활동이 특별하지 않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악인이 자신의 행위를 숨기고 상대(관객)를 설득한다. 그리고 그들의 살인행위는 일종의 경제활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 이들의 범행동기는 오세이지족이 가진 땅과 석유시추권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플라워 킬링 문'의 범죄행위는 오늘날의 경제활동과 크게 차이를 두지 않는다. 영화에서 돈 버는 것에 대한 대화가 장황하게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글로벌 경기침체가 이어지는 가운데 미국도 장기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세계 경제의 패권을 거머쥔 미국은 인플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다가 다른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한다. 애초에 미국은 유럽 백인들의 침략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며 원주민의 피와 살점 위에 '천조국의 위엄'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플라워 킬링 문'이 경제대국 미국에 대한 조롱인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어째서 마틴 스코세이지의 자전적 이야기로 읽힐 수 있을까? 오세이지족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날 때 그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넷플릭스에서 만든 '아이리시맨'을 다시 꺼내야 한다.
'아이리시맨'은 1970년대 필라델피아에서 활동한 마피아 조직에 대한 이야기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워낙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린 영화는 '비열한 거리', '좋은 친구들', '분노의 주먹' 등 마피아가 등장하는 영화나 '택시 드라이버', '케이프 피어' 등이 언급된다. 특히 마틴 스코세이지와 별개로 갱스터 느와르 영화는 현대 미국영화를 만든 근간과 같다(마틴 스코세이지의 절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대부' 시리즈를 만들었다). '아이리시맨'은 마틴 스코세이지가 자신의 영화를 포함해 미국영화의 근간이 된 갱스터 느와르 영화를 관에 집어넣고 관뚜껑 닫는 작품이다. 병실에 초라하게 앉아있는 노령의 프랭크는 몰락한 갱스터 장르의 현재를 보는 것과 같다.
'플라워 킬링 문'은 세계 최강에 이른 미국 경제의 추악한 시발점과 같은 사건을 파헤친다. 오세이지 살인사건으로 미국 경제가 시작됐다고 볼 수는 없지만, 경제활동하듯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죽임으로써 실제 경제활동이 이뤄지는 백인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서 백인 중심으로 성장한 미국 경제의 근간을 찾아낸다. '플라워 킬링 문'은 실제로 여느 갱스터 영화들처럼 건조하게 사람을 죽인다. 그러나 살인의 무게는 이전의 갱스터 영화들보다 무겁게 다가온다. 똑같은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국 경제'는 '아메리칸 드림'의 다른 이름이다. 미국이 급격한 경제성장을 하면서 세계의 사람들이 미국으로 몰려들었고 미국은 다민족이 모인 기회의 땅이 됐다.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미국으로 향한 이탈리아인이나 아일랜드인 중에서는 '아이리시맨'의 프랭크와 마찬가지로 마피아가 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감히 '플라워 킬링 문'과 '아이리시맨'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의 기원 탐구'라는 이름으로 맥락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미국영화에 바탕을 만들고 영화로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한 마틴 스코세이지는 이제 미국의 근간을 되묻는다. 이는 스스로를 향한 물음과도 같다.
마틴 스코세이지와 함께 미국영화의 바탕을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는 '파벨만스'를 통해 대단히 사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이 영화에는 실존인물의 이름이 사용되진 않지만, 이미 기획 단계에서부터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알려졌다. '파벨만스'는 스필버그 영화의 근간과 같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새미는 아빠가 사준 8mm 카메라로 철들기 시작한 후부터 영화를 찍는다. 부모와 함께 세실 B. 드밀의 '지상 최대의 쇼'를 본 순간부터 새미의 곁에는 늘 가족과 영화가 있었다. 이는 감독 스스로 자신의 영화적 근간에 가족이 있었음을 고백하는 셈이다. 실제로 그가 '죠스' 이후에 만든 'E.T'나 '미지와의 조우', '후크', '쥬라기 공원' 등은 흔히 말하는 '가족영화'로 알려져있다. 현재까지도 그의 영화에서 '뮌헨', '더 포스트' 정도를 제외한다면 비정하고 차가운 시선의 영화는 찾기 어렵다. '파벨만스'는 그의 초창기 영화가 어린 아이의 상상처럼 자유로웠던 이유를 알려주는 작품과 같다.
다만 영화의 주된 이야기가 되는 가족은 그의 동심처럼 온전히 화기애애하지 않다. 새미의 엄마 미치와 새미 아빠의 절친 베니의 관계는 마치 시한폭탄처럼 이 행복한 가족사의 불안한 균열과 같다. 여기에 새미가 학교에서 받는 인종차별이나 온전하지 못한 짝사랑도 가감없이 보여지면서 꽤 비정하게 느껴진다. 스필버그의 영화들이 안겨준 극적인 드라마에 비하면 '파벨만스'는 치정 스릴러나 유대인 인종차별 시대극에 가깝다. 결국 가족은 해체되고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 해체와 상실의 끄트머리에서 새미는 우상과 같은 존 포드를 만난다. 그리고 존 포드에게 간단한 가르침을 얻은 새미는 스튜디오의 문을 나선다. 그리고 영화는 존 포드의 당연한 가르침을 행하면서 끝이 난다. 새미(=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감독이 됐음을 알리는 순간은 이 마지막 장면이다.
'파벨만스'는 스필버그의 영화적 근간을 되짚는 작품이다. 그의 영화는 시대상에 투영된 인간을 담는 마틴 스코세이지에 비해 사적이고 내면적이다. 역사에 기인하는 대신 개인의 내면에 담긴 깊은 세계와 상상력을 표현하는 게 스필버그의 방식이다. 개인의 가치관이 완성되는 곳은 개인과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 그리고 학교다. '파벨만스'가 묘사하는 가족과 학교는 불완전하다. 어쩌면 새미는 성공적인 삶을 보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불완전한 환경은 때로 사람을 타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타락한 원인을 환경에서 찾는다. '파벨만스'는 그런 변명에 단호하게 반박한다. 불완전한 환경에서도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은 자기 길을 걷는다. 새미에게 그것은 '영화'다.
사실 불완전한 환경에는 시대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새미가 학교에서 겪었던 인종차별에는 시대상이 반영돼있다. 새미의 가족이 미국 애리조나로 이사를 갔던 1960년대에는 미국 내에서 나치당이 창설될 정도로 반유대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던 시기였다. 이런 인종차별과 함께 새미의 아버지가 미국 유명 전자제품 회사 GE에 취직할 정도로 인종차별이 과거에 비해 희미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새미는 학교 내 인종차별에 무너질 수 있었지만, 희미해지는 인종차별을 극복한다. 인종차별이 무뎌진다는 외부의 요소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같은 학교 분위기는 새미를 조금 더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됐다. '파벨만스'에서 시대가 개입하는 지점은 이 정도다. 환경은 그저 환경일 뿐이다. '파벨만스'는 새미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보여주면서 환경에 매몰돼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새미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스티븐 스필버그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감독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플라워 킬링 문', '파벨만스'는 각각 ▲변화에 발 맞춰 전진한 사람과 ▲시대의 일원으로서 반성하는 사람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전진한 사람이 존재한다. 만약 누군가 삶에 대해 "변화에 발 맞추되 자신을 잃지 말고 전진해야 하며, 때로는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꽤 따분한 사람일 수 있다. 무엇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온전히 잘 살았는지 되묻게 될 것이다. 영화를 깎는 세 명의 노인은 자신의 삶과 시선을 담은 영화를 깎아 사람들 앞에 선보였다. 여기에는 관객들을 향해 "이렇게 살아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직접적인 제목을 가진 영화조차 "어떻게 살아라"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이렇게 살았다"를 말한다.
이들 세 영화는 마치 '그들 각자의 묘비명'처럼 들린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를 영화에 담아 표현하며 그대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지 묻는다. 물음을 건네는 자는 물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 사실은 관객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한 사람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며 다른 사람은 현대 미국영화의 바탕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감독이다. 물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나는 이렇게 살았다"라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물음을 받은 관객들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우리들 각자의 묘비명이 될 것이다. 평생을 안고 고민해야 할 숙제인 셈이다. 나는 그들 각자의 묘비명을 보면서 영화의 힘을 느낀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거창한 기대와 그에 대한 물음을 품어본 지 오래다. 이제는 영화가 삶을 바꿀 수 있을지 물어본다. 내 삶의 중요한 순간에 함께 한 영화들은 몇 편 존재한다. 그 영화들은 내 삶을 바꿨을까?
그리고 '그들 각자의 묘비명'과 별개로 나는 작은 바램을 가져본다. "...아직 청춘이신데 영화 더 만드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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