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 베이커의 '레드 로켓'은 꽤 충격적인 영화다. 적어도 '플로리다 프로젝트'라는 풋풋하고 애절한 영화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한물간 포르노 배우와 10대 소녀의 관계를 다룬 이 영화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수준의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나마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영화 '탠저린'을 본 관객이라면 이 감독이 마냥 감성 충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션 베이커의 영화는 감성보다는 밑바닥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려는 의지가 강하다. 로스앤젤리스('탠저린')와 플로리다('플로리다 프로젝트'), 텍사스('레드 로켓') 등 미국의 유명한 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누구도 찾아가보지 않을 것 같은 뒷골목을 배경으로 그곳의 삶을 보여주는 게 션 베이커 영화의 특징이다. 다행스럽게도 '레드 로켓'의 파렴치한 주인공 마이키(사이먼 렉스)은 끝내 참교육을 당한다. 이리저리 치이다가 한밤의 질주를 하는 마이키의 모습은 꽤 시원하면서 폭소를 안겨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논쟁적인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정식 개봉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정식 개봉했다가는 이 도발적인 내용 때문에 온라인이 시끄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18년 '플로리다 프로젝트'로 내한해 팬들의 지지를 얻었던 션 베이커가 다시 한국을 찾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레드 로켓'은 도발적인 영화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야자수의 전선'은 '레드 로켓'와 닮았지만, 더 도발적이다. '레드 로켓'이 10대 소녀와 30대 어른이 관계를 코미디로 풀어내고 있다면 '야자수의 전선'은 오싹한 스릴러 영화다. 서스펜스 장면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영화 내내 지루하다고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야자수의 전선'은 무서운 장면 하나없이 관객을 오싹하게 만든다. 그 오싹함의 키워드는 '가스라이팅'이다. '야자수와 전선'의 주인공은 10대 소녀 레아(릴리 맥클러니)다('레드 로켓'의 주인공은 30대 마이키다). 레아는 엄마와 단둘이 지내면서 또래 친구들과 어울린다. 평범한 10대 소녀의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레아는 이 삶이 지루하다. 시골마을에는 재밌는 일이 없고 또래들의 사고는 유치하다. 또래 남자친구 패트릭(아르마니 잭슨)과의 관계도 만족스럽지 않다. 일상이 재미없다고 느끼는 레아 앞에 어느날 톰(조나단 터커)이 나타난다. 30대 톰은 매력적인 외모와 언변으로 별 거 없이 레아 앞을 지나가다 그녀를 구해주고 가까워진다. 레아 역시 톰을 보자마자 호감을 느꼈다. 그렇게 영화는 10대 소녀와 30대 남자의 로맨스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레아의 주변에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경고등이 꽤 켜졌다. 친구들은 "뭐 노리는 게 있어서 너한테 접근했을 거다"라고 경고한다. 식당의 웨이트리스는 "전에 저 남자가 다른 여자와 온 걸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어른 관객은 톰의 말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톰은 레아에게 달달한 말을 속삭인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몇 개의 뼈가 도사리고 있다. 그 뼈는 레아와 친구들, 레아와 어머니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예를 들어 "너를 생각하는 건 나뿐이야", "네 곁에는 나 밖에 없어", "나랑 단둘이 뉴욕으로 떠나자" 등이다. 이런 말들은 어른이 보기에는 충분히 우려스럽지만, 레아는 거기에 현혹돼 친구 엠버(퀸 프랑켈)와 싸우게 만들고, 엄마(그레첸 몰)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게 한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끝나갈 즈음, 레아는 톰과 새벽도주를 떠난다. 그리고 그제서야 톰은 본색을 드러낸다.
톰은 레아를 꼬드겨 성매매를 강요하게 한다. 그 과정 역시 폭력적 강요가 아니라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말로 꼬드긴다. 어차피 레아는 친구, 엄마와 단절됐다. 10대 소녀인 레아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톰 밖에 없다. 톰은 레아에게 "우리가 살아가려면 네가 이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호텔방에 홀로 남겨진 레아. 감독은 레아가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장면을 긴 롱테이크로 찍는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한 장소에 머무르며 레아의 불안한 심정을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감독이 이 장면에 공을 들였다는 걸 잘 알 수 있다. 톰과 거래한 성매수자가 방에 들어왔다. 영화는 중년남성인 성매수자에 대해 극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인 만큼 나쁘게 묘사할 수 있지만, 이 장면에 등장하는 성매수자는 평범하다 못해 자상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중년남성이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불안해하는 레아에게 괜찮냐고 물어본다. 그리고 레아를 진정시키면서 자상한 말을 하더니 결국 자신이 방에 들어온 목적을 이루고 나간다. 감독은 가스라이팅이나 미성년자 성매수자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평범한 일상 속에 흐르듯 지나갈 수 있으며 자칫하면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하는지, 저 사람이 미성년자 성매수자인지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호텔방의 장면에 이르러서야 이 영화가 의도한 게 명확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레아는 톰에게서 도망쳤다. 그리고 친구 엠버에게 도움을 청한 뒤 집으로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했다. 개학을 하루 앞둔 어느 날도 레아는 엄마의 일을 도와주고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떤다. 잘 지내는 것 같던 레아는 갑자기 톰이 살던 모텔로 찾아간다. 이미 톰은 연락처도 바꾸고 잠수를 탄 상태다. 도망친 레아가 경찰에 신고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톰과 대화한 적이 있는 여자에게 찾아가 톰의 연락처를 묻는다. 레아가 톰을 찾으려 할 때 관객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톰과 통화하는 레아의 마지막 대사는 그 모든 상황을 설명한다. 그 마지막 대사는 한 순간에 이 지루한 영화를 오싹한 심리 스릴러로 만들어버린다.
가스라이팅과 관련된 영화도 보고 뉴스나 교양 프로그램도 챙겨봤다. 그럼에도 가스라이팅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혹시 내가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는건가"싶어 가끔 주변에 물어보기도 한다. 폭력적인 상하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가스라이팅은 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도 구분하기 모호해진다(오은영 박사님은 돼야 정확히 구분할까). '야자수의 전선'은 마치 가스라이팅의 교과서같은 영화다. 고민하지 않는 관객이라면 톰이 영화 내내 하는 말들조차 가스라이팅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수 있다. '야자수와 전선'이 우리나라에 개봉한다면 꽤 논란이 될 수 있다. 영화는 제이미 덱 감독의 동명 단편영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감독은 이야기를 구상할 때부터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 영화는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가장 직접적이도 도발적인 소재를 택하고 있다. 논란이 된다면 창작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낼 수 있다.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파급력 때문에라도 국내에 개봉하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이 선택할만큼 매력적인 소재가 아니라서 마케팅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마케팅 회사의 노력에 따라 흥행과 이슈면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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