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8

'서울의 봄' - 두 개의 리더십(스포주의)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를 좋아한다. 이것은 사내 둘이 대결하는 이야기지만, 관객은 한쪽 편을 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복싱경기의 특징이 그렇다. 두 사람이 피 터지도록 싸우지만, 거기에는 선악구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규칙에 의해 싸우고 승패를 정할 뿐이다. 단순한 듯한 이야기에 진정성을 불어넣으니 영화는 어느 장면, 어느 캐릭터 하나 버릴 게 없는 수준이 돼버린다. 위와 같은 이유로 '주먹이 운다'는 '남자들의 끝장 대결'을 다룬 영화 중 독특한 포지션이다. 대부분 남자들의 끝장대결을 다룬 영화에는 선악구도가 존재한다. 관객은 당연히 선한 자(혹은 조금 덜 악한 자)의 편에 서서 정의가 구현되는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여기에 강한 것들 끼리 맞붙는 데서 오는 타격감도 즐겁다. 가장 ..

콘텐츠/리뷰 2023.11.17

세기말 '또 다른' 시네필 다이어리

20세기말에 중학생이었던 나는 공포영화를 좋아했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10대들은 무서운 이야기나 놀이공원 귀신의 집을 좋아한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 시절 베스트셀러 '공포특급'의 에피소드들 중 몇 개는 지금도 기억에 남을 정도다.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김청기 감독의 로봇물이 좋았고 성룡, 홍금보, 원표의 영화가 좋았던 나는 1995년을 계기로 영화에 대한 지식이 조금 넓어졌다. 그 해는 영화탄생 100주년이 된 해였고 서점에는 '세계영화 100선'이라는 책들이 쏟아졌다. 당시 영화평론가들이 저마다의 시각으로 고른 100편의 걸작들 가운데 내 눈에 띈 것은 조지 로메로의 1968년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었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좀비영화'인 그 작품이 보고 싶어서..

콘텐츠/기획 2023.11.06

그들 각자의 묘비명 - "나는 이렇게 살았다"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인간의 생애주기로 봤을 때 나는 아직 죽음을 걱정할 나이는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나보다는 죽음에 조금 더 가까워진 나이기는 하다. 주변 사람들이 결혼하던 시기를 지나 돌잔치를 하던 시기를 거치고 나면, 주변 사람들의 가족들이 세상을 떠나는 시기가 온다. 그 시기가 나면 친구와 형제가 세상을 떠나는 시기가 오게 된다. 아마 그때쯤,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약 그때가 온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할까? 죽음을 가까이 두지 않아서 그 생각에 감히 근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을 가까이 둔 노인의 생각을 읽어보면, 죽음이 삶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는 참 좋은 것 같다...

콘텐츠/리뷰 2023.11.06

상처 입은 아이들을 위로하는 세 가지 시선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지도 12년이 지났다. 이 정도 지난 일이라면 슬슬 역사책으로 돌아가야 할테지만, 일본은 아직 그러지 못한 분위기다. 지진의 후폭풍과 같았던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여전히 세계의 골칫거리다. 일본은 앞으로도 수십년동안 이 원전사고를 수습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동일본 대지진이 가져간 훈장과 같다. 일본이, 그리고 세계가 동일본 대지진을 현재진행형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동일본 대지진에 관한 인상은 강하게 남아있다. 산술적으로 따져본다면, 지진이 일어났던 2011년에 10대 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2023년 현재 20대가 됐다. 아마도 그들에게 일본사회는 저성장과 초고령화, 지진의..

콘텐츠/리뷰 2023.10.23

'괴물' & '진리에게' - 루머의 루머의 루머

※ 이 글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소문만 많이 들었다. 재밌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긴 호흡의 드라마를 잘 못 보는 편이라 아직 시도조차 못하는 편이다. 드라마 관람 유무를 떠나서 나는 이 제목이 참 마음에 든다. 심지어 영어 원제인 '13 REASONS WHY'와도 다르지만, 여러가지로 써먹을 지점이 많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 글에도 써먹었으니 이 한글제목을 지은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천재적이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라는 제목은 픽션 바깥에서도 쉽게 써먹을 수 있다. 어쩌면 '논픽션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이 제목이 픽션으로 들어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논픽션의 세..

콘텐츠/리뷰 2023.10.16

'밀수' & '거미집' - 70년대에 바침

소위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2003년 이후, 영화의 표현은 한결 자유로워졌다. 2003년 이전, 그러니깐 1990년대 한국영화는 이른바 트렌드에 쫓기는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조폭 코미디나 화장실 코미디, 혹은 패배주의에 찌든 조폭액션영화, 어느 장르 하나가 유행하면 귀신처럼 그 장르의 영화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한국영화 태동기에 공장에서 양산하듯 영화를 찍어대는 제작자, 투자자들의 정서가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한 예로 그 시절 수요가 가장 확실한 비디오용 에로영화들은 '007' 수준으로 시리즈가 만들어졌다. '애마부인'만 해도 13편까지 나올 정도였다. 199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 사이 등장했던 '1세대 씨네필 출신 영화감독'들은 공교롭게도 2003년이 돼서야 싹을 틔우기..

콘텐츠/리뷰 2023.09.28

[스포주의] 넷플릭스 'D.P 2' - 부조리의 근원을 찾아서

※ 이 글은 넷플릭스 'D.P' 시즌2 프레스 스크리닝으로 4화까지 보고 작성한 글입니다. 군대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건강한 대한민국 남자들은 보병으로 복무하거나 포병 등 전투병과에서 군복무를 한다. 그 가운데 누군가는 다소 낯선 보직에서 군복무를 하기도 한다. 이는 전투지원병과인 공병이나 행정병에 해당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낯선 보직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테니스장 관리병이나 CP병, 군 전용 콘도 관리병도 존재한다. 당장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군단지원병원에서 작전보안병으로 복무했다. 보병, 포병으로 복무한 친구들은 군 병원에 간 나를 신기하게 보기도 했다. 김보통 작가가 했다는 'D.P' 역시 처음 보는 보직이다. 탈영병 체포조라는 다소 난해할 수 있는 이 일을 병사에게 시킨..

콘텐츠/리뷰 2023.07.18

[스포주의] '가부키초의 탐정 마리코' - 방사능이 배회하는 거리

1983년작 영화 '그날 이후(The Day After)'는 어린 나에게는 꽤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미국 ABC 방송국에서 제작한 TV영화인 '그날 이후'는 핵폭탄의 공포를 사실감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특히 핵폭탄이 터지고 도시가 초토화되는 장면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그날 이후' 이후에 많은 영화들이 핵폭발 장면을 표현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폭발은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됐지만, '그날 이후'보다 자세하게 표현한 영화는 아직 없었다(핵폭발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터미네이터2'조차 '그날 이후'에 빚을 지고 있는 수준이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핵폭발에 노출된 사람이 증발해버리는 장면이다. 강한 빛과 열기에 노출된 사람들은 불타버리는 것을 넘어 '증발'해버리고 그 흔적만 남는다..

콘텐츠/리뷰 2023.07.17

어떤 영화의 끝없는 싸움: 자본 계급을 조롱하다

마르크스의 계급론은 불평등을 상징하지 않는다. 계급의 투쟁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성장동력과 같은 역할을 한다. 마치 '설국열차'처럼 한정된 공간 내에서의 인구 과밀을 해소하기 위해 적당한 계급 투쟁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기관사 공백을 최소화해 열차를 계속 운행시킨다. 단지 인구과밀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만이 아니더라도 계급투쟁은 정체된 사회의 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 여기에는 지도자가 바뀜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정치 이념의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명사회에서 '계급'은 로마 시대부터 존재했었고 그것은 어떤 정치적 이념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계급은 주로 직업이나 신분, 출생에 기인했다. 왕족부터 시작해 귀족, 종교계, 상인, 노비 등. 부모의 신분은 그 자녀의 신분을 태어날 때부터 결..

콘텐츠/기획 2023.07.11

두 개의 운명론 - '플래시' vs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MCU) 이후 '멀티버스'라는 개념이 꽤 일반적으로 바뀌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 개념을 차용하면서 가끔 '멀티버스'라는 개념은 과학의 영역을 넘어 어딘가에 실존하는 개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멀티버스는 시간의 영역에서 인식된다. MCU식 표현을 빌리자면 시간은 일직선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쓰여진다(사실 이런 개념은 '백투더퓨쳐2'에서 먼저 등장했다). 그러니깐 "오늘 나는 커피를 마신다"라는 선택을 한 유니버스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를 선택한 유니버스가 따로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커피에 대해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많은 이야기들이 인과론에 따라 다르게 쓰여진다. 하나의 선택이 원인이 돼서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고 다른 결과들은 각기 다른 유니..

콘텐츠/리뷰 2023.06.28